복녀 엘리사벳 전기

그 분은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4)

할미 아녜스 2007. 2. 17. 21:19

3. 발 넓은 엘리사벳


-십대소녀 시절-

 

디죵 음악원에서의 피아노 수업은 엘리사벳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 만일 엘리사벳이 계속하기를 원한다면, 빠리 음악원에 가야 할 것이었다. 엘리사벳은 디죵에 머물면서 그 대신에 화성학(和聲學)을 2년 더 공부하기로 했다. 거기에 더하여 그 사람들이 하는 일반교육이 그들의 음악 수업을 따라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카데츠 부인은 이르마 포레이 양을 두 딸아이를 위한 새 선생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포레이양은 지나치게 안일무사주의였고 공부를 너무 태만하게 가르쳐 두 딸아이의 성적이 나아지지 않았다.
11월 말까지 새 학생들을 더 잘 가르쳐보려는 생각에 포레이 선생은 두 학생에게 수필을 쓰게 했다. 즉 각자의 신체적 도덕적 자화상을 그려보게 했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내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쓰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숙제를 처리했다.

자신의 신체적, 도덕적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다루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제대로 적어보겠다.
자랑거리는 없지만, 내 전체적인 외모가 볼품없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 피부가 검은 편이고, 나이에 비해 키가 크다고들 한다.
내 눈동자는 검고 반짝이며 내 굵은 눈썹은 나를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그 나머지도 보잘 것 없다. 내 “우아한” 두 다리 때문에 나는 “발 큰 엘리사벳”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베르타 여왕님처럼! 이것이 내 신체적자화상이다.
내 도덕적인 모습에 대해 말해 본다면, 나는 비교적 좋은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쾌활한데 좀 차분하지 못한 편이라고 고백을 해야겠지, 난 마음씨가 착하며 선천적으로 요 염한 여자다. “사람은 작아야 한다.”고들 한다. 나는 게으르지 않고, “일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인내의 모범이 되지않고도 나는 흔히 내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안다. 나는 원한을 품지 않는다. 내 도덕적인 모습은 그저 이런 정도다. 약점은 있는데,
아아... 장점은 별로 없구나! 장점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 지겨운 숙제가 끝나서 기쁘다.

대체로 엘리사벳의 친구들은 그녀가 예쁘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엘리사벳은 보통 때는 흑갈색의 숱이 많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푼 채로 두거나 길게 땋아서 늘어뜨리고 있었다.
프랑소와 수르동의 말에 따르면, 엘리사벳의 입은 너무 크고 코는 좀 지나치게 위로 치솟아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유별나게 광채가 났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특징짓는 것은 비길 데 없는 그녀의 검은 눈이었다.

앙뜨와네뜨 드 보베는 이렇게 말했다. “엘리사벳의 눈빛은 대단했어요. 그리고 그 미소!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그녀의 광채, 그 눈빛이었어요. 난 마치 그녀가 나를 곧장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그중에서도 그녀가 기도드리고 있을 때나 성체를 영하고 돌아오는 때의 엘리사벳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14살의 나이인데도 엘리사벳은 인내심이 없기는커녕 극기심과 자제심(自制心)이 그녀의 특질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무례함이나 불의(不義)를 당하는 때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그녀 자신만은 깨달을 수는 있었을 것이고 참지 못해 화난 말은 이를 악물어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했을 것이지만, 엘리사벳의 화를 잘 내는 기질은 옛날 것이 되어 있었다. 엘리사벳의 친구들 중 가장 가까이서 관찰한 친구가 지켜본 바로는 엘리사벳은 참으로 우아하게 그리고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게 자제력을 실천했고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었으며 다른 이들이 원하면 다 양보를 했다.
그녀의 어떤 한 친구는, 엘리사벳이 남을 나쁘게 말하거나 거짓을 말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을 증언했다.
엘리사벳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점은 그녀의 친절한 태도와 인정(人情)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굉장한 추진력과 유머감각이었다. “엘리사벳은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기 보다는 그 세상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 즐겼던 것처럼 보였습니다.”라고 프랑소와는 간단하게 요약했다.
음악원에서 보낸 그해는 동생 기트가 피아노에서 1등상을, 엘리사벳은 화성학(和聲學)에서 1등상을 획득하면서 끝났다. 몹시도 무덥고 습기 찬 여름이어서 그들은 디죵을 떠나 미디로 갔고 거기서 가족 일행은 미레꾸-르라는 소나무 숲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가족들은 샹빠뇰에서 오랜 친구들인 알로 집안 식구들과 더 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매일을 관광객인 양 돌아다녔습니다. 마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했지요. 우린 다리가 튼튼해서 20 킬로미터쯤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어요.”라고 엘리사벳은 휴가 갈 때 갖고 다니는 일기에 썼다. 두 집안의 맏딸, 마리 루이즈와 엘리사벳 보다 한살 반이 어린 샤를르는 일행이 전부 여자들인 것에 좀 질렸던지, 여행하는 중에 어느덧 엘리사벳과의 말다툼을 그쳐버렸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샤를르가 좋았다. 엘리사벳이나 기트에게는 “남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는 엘리사벳으로서는 음악원에서의 마지막 해였다. 기트는 우수상을 땄고 그 지방신문은 기트를 ‘작은 신동’이라고 평했다. 그런 다음 가족들은 꽉 짜여진 일정으로 휴가를 다시 한 번 떠났다. 엘리사벳은 이 일정을 알리스 셰르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깔리빠에 안전하게 도착했어. 엄마가 걱정하신 것보다는 덜 피곤했지.
리옹에서 4시간을 머물었는데 이 4시간은 푸르비에르를 순례하기 위한 시간이었단다.
거긴 사람으로 붐볐단다. 대성당은 멋졌는데, 리옹은 모든 재산을 그 대성당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더군.
푸르비에르를 떠나 우리는 노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고 8시에는 셋뜨를 향해 떠났어.
셋뜨에 도착하니 다음 날 새벽 5시였어.
우리는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바다를 보고 멱 감는사람들을 보며 아침 시간을 보냈지.
오후 4시 에 깔리빠에 돌아왔는데 그 곳에서 사촌들은 우리에게 응석을 부리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멋진 미디의 일품요리를 즐겼단다. 기분 좋은 산보를 했는데,
태풍이 막 지나간 터라 기온이 너무 신선해서 거의 차가운 정도였어.
추신(追伸)에 엘리사벳은 이런 말을 썼다. “머리를 말아 올렸어. 그랬더니 내가 훌쩍 숙성한 것처럼 보이더군.” 갑자기 엘리사벳은 젊은 숙녀가 되어 있었다.
그들 일행은 깔리빠에서 까농 앙글레를 보러 쌩 일레르로 갔는데 거창한 식사로 일행의 위(胃)가 한계에 도달했고, 그 다음에는 리무로 향했는데, 거기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친구, 가브리엘르 몽뻴리에르를 만났다. “몽뻴리에르는 스무 살인데 아주 매력적이야.”라고 엘리사벳이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우리는 그 시골에서 아주 멋진 여행을 하고 있어. 내일은 기놀레 레 벵에서 하루르 보낼 참인데, 너무너무 기대가 돼...
난 여기서 많은 곡을 작곡할거야. 내 친구가 작은 그랜드 피아  노를 가지고 있어서 난 너무 기뻐. 피아노 음 색이 너무 좋아서 그 앞에서 난 몇 시간이고  보낼 수가 있었어.
가브리엘르의 사촌과 같이 다니고 있는데 이 사촌이 바이얼린을 아주 잘 키더라.
게다가 그녀의 남편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여서 우리는 네 손을 맞추어 연주도 했지.
루르드도 방문했다. 아마 엘리사벳이 루르드에 간 것은 두 번째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10월 말에 디죵에 돌아왔다.
엘리사벳의 편지에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의 가르멜에 대한 그리움이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가르멜의 독거(獨倨)와 힘들고 엄격한 봉쇄수도생활을 동경(憧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그녀가 “내 마음의 메아리“라고 이름 지어 불렀던 그녀의 시(詩)에서 뿐이었다.
디죵 가르멜은 그녀 가족이 사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녀의 침실 창문에서 흘끗 내다보기만 해도, 수녀원 정원의 한 부분, 품위 있는 가로수길, 그 정원에서 일하거나 기도하는 수녀님들, 그 수녀님들이 입은 수도복의 세세한 것 모두를 볼 수 있었다. 저녁삼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면 엘리사벳은 조용히 발코니로 걸어 나와 수녀님들과 함께 기도를 했고, 수녀님들의 수방(修房)인 작은 창문들이 길게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엘리사벳은 이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가까이 있는 가르멜이 아직도 그렇게 멀다고 생각하니 애가 탔다.
1987년 2월 중에 세 번의 착복식이 있었다. 그 착복식에는 엘리사벳이 참석했는데 그 세세한 것을 모두 보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조용한 가르멜 수도원의 차임벨 소리가
천천히 하늘로 퍼지고,
제대를 꾸민 꽃들은
고운 향기를 풍기고 있네.
촛불은 여기저기서 빛을 발하며
여기가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네.
갑자기, 신부의 혼례복을 입은
차분한 신부(新婦)가 나타났네.
얼굴은 해맑고 눈부셨으며
눈엔 기쁨이 넘쳐흘렀네.
천상의 배필이며
선(善)한 판관이신
사랑하는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지금 이 순간을 맞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울까.
수도원문 앞에 가서
조용히 문을 두드리니
엄숙히 베일로 가린 분들이
노래를 부르며 와서 문을 여는구나.
이 천국의 친한 친구이신
위대한 그리스도 수난상 아래
그 분의 신부는 무릎을 꿇고.
천상배필에게 그녀의 마음을 바치네.
그리고 이 세상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한 다음
그녀는 홀로 살기위해 사라져.
이들 뽑힌 영혼들과 함께
깨끗하고 겸손한 가르멜인이 되네.

엘리사벳은 기도하거나 미사 참례하기위해 종종 가르멜 성당에 가곤했다.
그녀는 응접실에 어쩌다가 방문한 통근 수녀들과 가끔씩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수녀들을 가까이서 볼 때 엘리사벳은 그 거친 수도복과 단조로운 십자가가 달린 나무로 만든 큰 묵주, 흰색망토, 가죽 띠 같은 것을 골고루 만져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것들을 모두 입고 있을 때를, 그래서 나무판으로 만든 침대가 놓인 빈 수방 하나를 가지게 되는 날을 그리워했다.
엘리사벳의 고해 신부인 쎌레네 신부님이 이즈음에 디죵을 떠났다. 다른 직책을 맡기 위해 서였다. 그 신부는 엘리사벳의 성소가 진실한것임을 오랫동안 확신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그 신부는 엘리사벳의 어머니에게 엘리사벳의 봉쇄수도생활에의 성소를 반대하지 말아줄 것을 강력히 권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간섭이 역효과를 냈다.
엘리사벳을 정말로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카데츠 부인은 엘리사벳에게 가르멜 금족령(禁足令)을 내렸다. 가르멜을 더 이상 방문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이것은 엘리사벳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아무 말 없이 순명했다.
그녀의 시에서 엘리사벳은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읊었다. 엘리사벳에게 이 보다 더 큰 희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빌라의 성녀 데례사의 저서들 속에 몰입하는 것과 가르멜의 영성을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이시기에 쓴 엘리사벳의 시들을 보면, 아빌라의 성녀 데례사의 저서들로부터 크나큰 영감을 받았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그 때 읽은 서적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손수 베껴 써서
소중하게 간수해 두었던 성녀 데례사의 저서의 필사본이었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기도가 호흡하듯 자연스러워 졌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습관화 되어 버렸다.

내 마음은 그분과 언제나 함께 머물고,
낮이나 밤이나 귀하신 천상친구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온유함을 그분에게 증명하고 싶습니다.

엘리사벳은 그분을 위해 자신을 순결하게 보존하고 싶었고,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을 하기 원했으며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그분을 위해 오랫동안 고통 받기를 원했다.
이 가식(假飾)없는 수업이 엘리사벳의 영성생활의 기초를 요약하고 있고, 거기서부터 그녀의 신비적 생활의 풍요로움이 용솟음치게 된다.
위의 시 안에 함축된 수덕주의(修德主義)는 이 연속되는 친교 안에서 그리고 그 긴 휴가를 즐기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살아남아 있었다.
1898년에 엘리사벳 가족일행은 따르베에 머물렀다. 이 따르베의 일을 엘리사벳은 긴 기쁨의 연속이라고 묘사했다. 광범위한 친구 집단들과 함께 엘리사벳은 춤추러가기도 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듣기도 했으며 시골로 여행을 떠나가도 했다. 춤출 때나 즐거운 파티시간 동안에도 엘리사벳은 그저 멍한 상태였고, 다부우 부인은 엘리사벳의 눈에서 꿈꾸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부인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엘리사벳, 너 어디가 있는 거야, 하느님을 보고 있지,” 엘리사벳은 부인을 보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따르베에서 일행은 천국의 한 모퉁이인 루르드로 갔다. 거기서 엘리사벳은 사흘 동안 그 동굴(Grotto)에서 기도하고 성체를 영할 수 있었다.
그녀의 묘사를 빌리면, 그것은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순례자들이 많지도 않았어요. 난 루르드의 정적(靜寂)이 너무 좋아요”라고 발렌티느 데푸궤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거기에서 그들 일행은 뽀오로 가서 최상의 벽걸이 융단이 있는 앙리6세의 샤또오(城)를 방문햇다. 그런 다음에 꼬떼레와 삐에레피를 거치며 경치가 장관(壯觀)인 길을 따라 뤼숑을 향했다. 그들은 이 훌륭한 산악경치에 압도되었다.
엘리사벳은 이것에 매료되어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삐레네 산맥의 여왕”인 뤼숑은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이들 일행은 거기서 이틀을 보냈는데, 덕분에 로스땅 사촌들 몇몇을 만날 수 있었고, 까농 앙글레와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랑도오를 타고 산 위 1800미터에 있는 “지옥의 심연(深淵)”까지 가볼 수 있었다.
엘리사벳과 젊은 친구인 마들레느 기에마르는 저 아래 강물로 곤두박질하는 어마어마한 폭포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거대한 골짜기 끝 언저리를 뽐내며 뛰어다녔다.
뤼숑을 뒤로하고 일행은 정든 칼리파로 갔다. 칼리파는 엘리사벳이 그리도 사랑했던 곳이었고 이곳의 평화스런 모습 앞에서는 피레네의 장관(壯觀)조차도 빛이 바래고 마는 그런 곳이었다. 엘리사벳의 관상하는 마음은 그녀가 사랑했던 이 시골생활의 정적(情迹)안에서 아주 평안해졌다.

일행은 마르세유, 그랑드, 샤르뜨르즈, 아네씨, 그레노블, 제네바를 거쳐 디죵으로 되돌아왔다. 마르세이유에서는 대서양 항로 정기선을 탔는데, 그때도 엘리사벳이 참으로 튼튼한 위장과 신경을 지녔음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작은 배 안에서도 거친 파도를 거뜬히 견뎌낸 것이다. 4기랑드 샤르뜨러즈에서는 울창한 숲이 있는 산들로 둘러싸인 멋진 시골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유명한 대수도원의 침묵의 심연(深淵)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수도원에 가까운 작은 수녀원에 머물렀다. 그 수녀원의 침대들은 지독하게 딱딱했는데 그런 침대가 있는 작은 수방을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 거기서 잤다. 아네씨에서는 카데츠 부인의 한 친구 집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호수를 관광할 수 있었다.
카데츠 부인은 엘리사벳에게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저 떠날 것만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했다. 엘리사벳은 성서 말씀 안에서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아름다움의 주인이기 때문(지혜 13, 3)에 이 아름다움의 주인은 피조물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벳이 본 모든 것은 그녀의 마음과 혼을 그 모든 것의 창조주께로 들어 올리게 했고, 그 창조주는 그녀가 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단 한분이신 주님임을 인식했기에 그녀는 그분이 더욱 애타게 보고 싶어졌다. 엘리사벳이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사랑한 봉쇄수녀원안에 들어갔을 때 이런 모든 경험들은 그녀에게 풍성한 기억과 체험의 보고(寶庫)가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