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녀 엘리사벳 전기

그 분은 나의 하느님이 십니다 (10)

할미 아녜스 2007. 2. 17. 21:28

9 조화로운 고독

-수련기-

 

엘리사벳은 서원하자마자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얼마 전에 성삼의 쥬느비에브 수녀의 동생이 모든 필요장비와 함께 중고(中古)카메라 하나를 그들에게 주었다. 쥬느비에브 수녀는 이젠 공동체 사진사가 되었는데, 그녀가 서원 후에 찍은 여러 장의 엘리사벳 사진은 엘리사벳이 교회법에 의한 심사를 할 때 찍은 사진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엘리사벳은 느긋한 모습에 눈동자 속에는 빛이 있고 미소가 입가에 번지고 있었다.
수르동 부인에게 쓴 편지에는 큰 글자로 이렇게 서 두었다. “행복합니다.”라고 서원을 한 직후, 엘리사벳은 예복 실에서 계속일 했지만 또한 성삼의 마리 수녀가 책임을 맡고 있는 “당번 수녀”가 되었다. 당번수녀가 하는 일은 수녀원 방문자들이나 일꾼들을 돕고 봉쇄 구역 안에 있으면서  통근수녀들과 상호 연락하는 일이다. 엘리사벳은 친절한점에 있어서, 또한 그들을 돕는 일에 있어서는 절대로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너무 자주 부탁한 것을 사과하는 어떤 수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말씀 하시지 마세요. 저는 수녀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만 합니다. 수녀님이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 이곳에 들고 와서야 되겠는가, 라는 생각일랑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외부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의 수녀들과 더불어 많은 활동과 접촉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엘리사벳에게는 그것이 하느님과 내적 합일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적 합일의 삶은 그녀의 가르멜에서의 진정한 일이었다.
그녀는 프랑보아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가르멜인의 삶이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하느님과 친 교하는 것이란다. 만일 그 분이 우리 수방과 우리 수도원을 가득체우시지 않으셨다면 아! 얼마나 허전할꼬!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통해 그 분을 본단다. 왜냐 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그분을 품고 있고 우리 삶은 예상된 천국이니까.”
하느님에 대한 이런 강렬한 인식은 그녀의 사랑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수련기 수녀들은 가끔 “침묵의 도전”을 했는데, 엘리사벳이 언제나 이겼다. 엘리사벳이 침묵을 깨는 때는 누군가가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뿐이었다.  이 침묵은 단순히 겉으로 들어나는 것만이 아니고 그녀가 하느님께 심원하게 몰입된 채로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엘리사벳의 수련기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청소하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친구는 엘리사벳이 기도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두려워 달아나 버렸고, 그래서 그 친구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손위 몇몇 수녀들은 엘리사벳의 기도의 심원함이 진정한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확신이 가질 않아서 판단을 계속 보류하고 있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아마 엘리사벳 옆 수방을 쓰고 있는 예수의 애메 였으리라)이 말했다.

삼위일체 엘리사벳 수녀에게서 단 한 개의 결점조차도 발견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혼자서 그것을 밝혀내 보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녀가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녀의 지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세속적 품위와 자신을 쉽게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애정 깊은 성격을 보면서, 비록 아직은 검정되지는 않았지만, 높은 수준의 완덕을 그녀가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간에 괘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덕목을 애기 할 때 저는 판단을 보류했습니다. 완벽하다고, 믿을만하다고 인정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느 날 부원장님이 저에게 말했지요. “당신은 엘리사벳 수녀를 좋아하지 않지요. 안  그래요?.....아니요 매우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고 나서 저는, “하지만 기다려본 후에 뭐라고 애기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원장님은 “그래요 내가 오직 말 할 수 있는 것은, 엘리사벳 수녀의 잘못을 누군가가 고쳐주었을 때는 언제나 참 온순하고 겸손했다는 점입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엘리사벳을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결국 저는 엘리사벳에게서 조그마한 결점조차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 어떤 이들은 이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만, 사실입니다.
그녀는 융통성이 없거나 속이 좁지도 않았고 언제나 겸손했으며 주제넘지도 않았습니다.
또 무심결에 저지른 실수나 유약함에 대해서도 겸손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자신에게 양보하는 일을 본적이 없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그녀는 늘 신앙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어떤 몹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영웅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 수방이 그녀의 수방 바로 옆이어서 매일 아침 기상 신호가 울리자마자 그녀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성가대가 기도실에 도착하면 그녀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로 푹 빠져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리 무릎이 결려도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고, 훗날에는 몸이 아무리 아파도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지요.

이 수녀도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를 안 엘리사벳은 그 수녀의 수방 근처를 걸을 때는 정말 조용히 했고, 그래서 그 수녀를 방해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엘리사벳이 하느님과의 합일을 표현하는 것은 그저 사소하고 거의 평범한 방법에서였다. 또 그녀가 친구나 친지에게 편지를 쓸 때나 그녀가 영성적 삶에 대해 이해한 바를 그들과 나눌 때도 점점 자신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엘리사벳은 봉쇄생활을 살아가는 수녀로서의 자신의 삶이 세속에 있는 친구들의 삶과 아주 다르니까 그들에게 일러줄 것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사벳은,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세속에서 가르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르멜 안에서의 삶에서부터 그녀가 찾아낸 예지(叡智)를 그들 스스로가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친구나 친지들에게 강력히 권했다. 자신과 친구들의 생활방식이 너무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르멜 안에 있는 엘리사벳이나 바깥세계에 있는 친구들이나 다 그리스도인적 삶의 풍요로움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근본적인 것이었으니, 그것은 사랑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서 개인으로서의 각자에게 바라시는 것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랑이었다. 엘리사벳은 자신이 가르멜 안에서 발견한 것을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어 쉽게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도에 관하여 프랑보아즈에게 편지를 쓸 때, 엘리사벳은 아주 간단하고도 실제적으로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 자신의 기도 수준은 높았지만, 변
덕스러운 어린 소녀의 수준에 맞추어서 그 본질을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친구야.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난 너를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내 영혼 안에 간직하고 있고 밤낮으로 매 시간마다 내가 찾아가고 있는 그분의 작은 내적 성소(聖所) 안에 너를 간직하고 있단다. 난 결코 외롭지 않아. 그리스도님은 언제나 거기서, 내 안에서 기도하고 계시지. 프랑보아즈, 네 말을 들으니 몹시 슬퍼지는 구나. 네가 불행하다는 걸 잘 알 수가 있어. 확실히 말해두지만 그건 네 흠이야. 마음을 편히 가져야 돼. 네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있고 극도로 흥분 되어있다 하니 믿을 수가 없어. 네가 그러면 다른 이들에게도 고통을 준단다. 아, 하느님께서 내게 가르쳐주신 행복의 비밀을 내가 네게 가르쳐줄 수만 있다면... 정말이야. 난 아주 행복해.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가 훼방을 당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항상 눈을 하느님께 향하고 있어야 해. 처음에 마음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을 때는 노력할 필요가 있지. 하지만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결국 우리는 아주 조용히 그곳에 도달하게 된단다.
 나처럼 네 영혼 안에 작은 수방을 만들어봐. 꼭 기억해 둘 것은, 하느님께서 거기 계시고 때때로 그 안에 들어가신다는 거야. 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나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 빨리 그곳 은신처를 찾아가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라는 거야. 아, 만일 네가 그분을 좀 알게 되면 기도 때문에 따분해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게는 기도가 휴식이요 긴장을 푸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 그냥 단순하게 사랑하는 그분에게 가서 엄마 팔에 안긴 어린 아이처럼 그분께 가까이 머물도록 해봐. 그러면 마음이 놓이게 되거든. 넌 내게 가까이 붙어 앉아서 네 비밀을 내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잖아. 그게 바로 네가 그분께로 가는 방법이야. 그분께서 얼마나 잘 이해해주고 계시는지를 네가 알면 참 좋겠는데... 만일 그걸 네가 이해한다면 넌 더 이상 괴롭지 않을 거야.

수도자 생활을 혼자서 꿈꾸고 있던 제르메느 드 쥬모에게 엘리사벳은 가르멜의 삶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보다 깊이 있게 편지 쓸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제르메느! 가르멜 수녀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죽 보아왔고, 그분께서 영혼들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 성부께 자신을 바치신 것을 보아온 하나의 영혼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이 위대한 예지(叡智) 안에서 그녀 자신을 생각해보면서 그분의 영혼이 베푸신 열정적 사랑을 이해하고 그분처럼 자신을 내어주기를 원해온 한 영혼이랍니다!... 그리고 가르멜 산 위에서, 침묵과 고독 안에서,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해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끝나지 않는 기도 속에서, 그 가르멜 수녀는 마치 벌써 천국에 있는 것처럼, 즉 “오직 하느님 옆에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답니다. 언젠가 그 수녀의 지복(至福)이 되어주시고 영광 안에 그 수녀를 온전하게 만족시켜주실 바로 그분은 이미 그분 자신을 그 수녀에게 내어주고 계시지요. 그분은 결코 그 수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수녀의 영혼 안에 머무십니다. 그렇게 말하기보다, 그 두 존재는 이젠 하나입니다. 그 수녀는 그토록 침묵을 갈망하기 때문에 무궁한 존재이신 그분을 향해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그분 안으로 아주 깊이 스며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수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분과 동일하기에 그 수녀는 어디서든지 그분을 찾아냅니다. 그 수녀는 그분이 만물을 꿰뚫어 비추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지상에 있는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제르메느, 당신은 당신의 영혼 안에 이 천국을 옮겨놓았으니 당신은 이미 가르멜인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가르멜인의 영혼 옆에 계시면서 마음으로부터 그 가르멜인을 인정하고 계시니까요. 절대로 그분을 떠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그분께서 거룩히 바라보시는 데서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주변에 계신 분들을 행복하게 해드리면서 그분의 평화와 사랑 안에서 온전한 기쁨을 만끽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엘리사벳이 자신의 영성적 삶의 심원함을 드러낸 것은 사제들에게 쓴 편지에서였다. 그녀는 사제들과는 매우 진실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 하면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스스로 참여한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의 사제직적 특성에 대해 엘리사벳은 강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벳의 가장 심오한 편지 중 몇 개는 죠르쥬의 동생, 앙드레 슈비냐르에게 쓴 것이었다. 그는 디죵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고 1903년 3월 28일에는 부제품을 받았다. 엘리사벳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에 처음 그에게 편지를 썼다.

사순절 대침묵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의 친절한 편지에 회신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영혼이 그대에게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로 만들어서 결혼을 완성시키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이 들이닥치셔서 제 영혼을 붙들어 넋을 잃게 하신다는 점에서 당신의 영혼과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봘레 신부님의 관상에 관한 말씀을 읽었을 때 저는 당신에 대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관상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성면(聖面)에서 비쳐오는 빛 속에서 사는 존재요,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 그것도 인간의 생각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아니라 육화(肉化)하신 말씀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생성된 빛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가는 존재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대에게는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이런 열정이 없으신가요? 침묵을 필요로 하는 이 열정은 때로 무척 강하답니다. 그래서 인간은, 관상하는 영혼에게 아름다운 모범이 되는 막달레나처럼, 주님의 발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들으며 그냥 가만히 머무는 법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려 오신 이 애덕의 신비 속으로 어떻게 하면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싶어 하지요. 우리가 마르타 역을 맡아 활동을 할 때도 그 영혼은 막달레나처럼 관상에 잠겨 있으면서 온전한 흠숭을 드리는 상태에 여전히 머물 수 있고, 굶주린 사람처럼 이 샘물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가르멜인들의 사도직이요 사제들의 사도직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거룩한 샘물 가까이에 늘 머무는 한, 하느님을 사방으로 빛내게 할 수 있고 그분에게 영혼을 바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혼과 친교하는 가운데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그 모든 활동을 동일시하고, 성부의 뜻에 따라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열정”이라 했는데, 엘리사벳은 가끔 자신의 기도가 너무 소극적인 것은 아닌지를 걱정했다. 특히, 예를 들면 큰 축일 전에 다른 수녀들이 9일기도나 묵주기도 또는 희생 활동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토의할 때 그랬다. 엘리사벳 차례가 오면 수녀들은 짓궂게도, “응, 엘리사벳 수녀야 침묵이잖아? 안 그래?”라고 말하곤 했고 엘리사벳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정말로 그녀의 걱정거리였다. 수련자들이 40시간의 봉헌 _ 이때는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성체현시를 한다. - 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엘리사벳은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하기로 결심하고 성가대로 갔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무릎을 꿇자마자 그녀에게 흔히 나타나는 깊은 침묵이 하느님 현존 앞에서 그녀를 휘감았고 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특별한 은총,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기도 형태이라는 내적 확신을 받았다. 그러자 그 문제는 이미 그녀의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엘리사벳은 바울로 성인의 말씀, ‘저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지기를” 원합니다.’는 글을 인용하면서 슈비냐르 수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맺었다. 이것은 바울로 성인의 작품들에 엘리사벳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크게는 성서에 대한 이해가 더욱 늘어갔다는 작은 암시였다.
매일, 아침을 시작하기 전에 수녀들은 ‘그리스도 닮기’라는 책이나 성서에서, 특히 신약의 4대 복음에서 발췌한 짧은 구절을 읽으며 약 15분 동안을 보내는 것이 가르멜의 관례였다. 지금까지 엘리사벳은 이것을 참된 열정 없이 의무적으로 해왔었다. 성서는 그녀의 영적 독서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강론을 듣고 많이 따랐던 사제들이나 그녀가 좋아하는 영적 스승들의 저서들은 성서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서구절들이 그녀에게 매우 큰 역할을 해주었고, 그녀의 영성은 성서를 중시하는 쪽으로 깊어갔다. 그런데 이제는 이 성서구절들, 특히 그녀의 “소중한 바울로” - 바울로 성인을 그녀는 그렇게 불렀다 - 는 차츰 그녀의 영적 양식의 주공급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디죵 공동체가 앙드레 슈비냐르와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디죵 공동체는 관구 내에서 그리고 신학교에서 계속적으로 생기는 근심거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앙드레의 부제품 서품식은 그런대로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사제 서품을 받을 준비가 된 신학생들 사이에는 걱정이 컸다. 그들은 르 노르데 몽시뇰이 당국와 협조했다는 이유로 그 몽시뇰에 의해 서품 받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몽시뇰이 그들 중 몇 사람을 멀리 보냈을 때도 나머지는 스트라이크를 계속했는데, 군대에 보내버리고 말겠다고 위협하며 설득하자 며칠 후에 그들이 겨우 돌아왔다. 부모들조차도 자식들이 그 몽시뇰에게 견진성사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축하를 받아야 할 다른 행사들도 가톨릭에 대한 지속적인 정치적 탄압 때문에 불쾌한 행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4월 16일에는 수녀들이 흰 베일을 쓴 예수탄생의 마리 수녀의 금경축을 축하했다. 그분은 73세로서 공동체 내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수녀였다.
그 수녀는 그때까지 5년 동안을 전신마비 상태에 있다가 엘리사벳이 선종한 지 5일 후에 선종했다. 그 전월에 의회(議會)는 많은 수도회에 대해 허가를 거부하고 수도원들의 폐문과 기물 몰수를 명했다. 디죵 공동체는 여전히 허가를 구하는 일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는데, 예수탄생의 마리 수녀의 금경축이었던 바로 그날 르 노르데 몽시뇰 대신, M. 마리니 총장대리가 와서는 수녀원 성당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못하게 했다. 이 폐쇄조치는 거의 3년 동안 지속되는 셈이었다.
동시에 마을 건너 쪽에서는 그리스도교 수도자 형제들이 그 나라를 떠나 망명생활을 하면서 다시 조직하기로 하고 그에 앞서 마지막 성체강복 예절을 행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디죵 가르멜 수녀원은 언젠가는 그들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달에 제르메느 원장은 벨기에로 여행했다. 수녀들도 역시 프랑스를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하여 벨기에의 노와쥬웨에 교사(校舍) 하나를 마련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장은 당분간이지만, 옮길 수 있는 물건들 중 몇 개를 그곳에 쌓아 둘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가 보았다.
아무리 미래가 불확실해도, 공동체는 제르메느 원장의 강력하고도 신심 깊은 영도(領導) 하에 규칙에 따른 일과를 조용히 지켜나갔다. 엘리사벳이 겪고 있던 정신적 문제는 그대로 공동체 회원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엘리사벳은 롤랑 이모에게 쓴 편지에 이 문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신앙은 참 좋아요. 그것은 어둠 안에 있는 천국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베일이 걷힐 것이며 그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의 빛 속에서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께서 “Veni(오너라)”라고 말씀해주실 것을 기다리면서 그분을 위해 지칠 대로 지치고 고통을 겪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분을 많이 사랑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박해를 받기 위해 당신의 작은 엘리사벳을 가르멜에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의 것이기에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제 영혼은 기쁩니다. 저는 봉쇄생활이 참 좋습니다. 저는 제 수방에서 “오직 하나이신 분과 단 둘이서” 머무는 것이 너무도 좋은데, 그런 작고 귀여운 수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면 어쩌나 하고 가끔 걱정했었지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어느 날 제게 그것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시겠지요. 저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제 영혼은 바울로 성인의 말씀대로, “누가 감히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제 마음 속에는 그분께서 거처하시는 고소(孤所)가 있습니다만, 그 어떤 것도 저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해에는 그들이 연피정을 할 수가 없었지만 우선은 그들이 머물던 곳에 그대로 머물 수 있었다. 가족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휴가를 떠났다. 기트는 몹시 피곤해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슈비냐르 가(家)는 가까운 시골 - 아마 생뜨-마리-쉬르-우셔라는 곳이었으리라 - 에 머물렀고, 카테즈 부인은 까농 앙글레에게 가서 머물렀다.
9월 초에 그들이 돌아왔을 때, 엘리사벳의 여동생은 행복하게 잘 쉬었기 때문에 혈색이 좋고 윤기 나는 얼굴빛으로 완전히 되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왜 그녀가 피곤해했으며 지금은 행복에 겨워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졌다. 기트가 첫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났을 때 엘리사벳은 아침기도를 드리기 전에 그녀의 수방에서 평온한 침묵 가운데 앉아 롤랑 이모를 위한 장면을 그려보았다.

하늘은 아름답고 너무도 맑으며 별은 총총합니다. 달빛은 서리 낀 창유리를 통해 들어와 수방에 넘치고 있습니다. 정말 황홀합니다. 창문을 내다보면 수녀원에 의해 둘러싸인 네모난 안마당이 보입니다. 그 한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큰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온 천지가 고요하고 침묵에 잠겨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아기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그 밤이 생각나고, 천사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찬미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기뻐하여라. 구세주께서 탄생하셨도다.” 사랑하는 이모님, 즐거운 성탄을 맞으셨습니까? 저는 크리스마스를 참으로 즐겁게 보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르멜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굉장하잖아요.

외적 평화는 영혼 깊숙한 평화 속에서 메아리쳤다. 엘리사벳은 며칠 후 까농 앙글레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제르메느 원장은 거기에 추신(追伸)을 가필했다. 주변에 있는 모두를 박해하며 몰아치는 사나운 태풍을 이 작은 한 무리의 수녀들이 만났으니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그 태풍이 자신의 평화를 헤집고 지나가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엘리사벳은 밤 미사와 성가대에서의 성무일도를 하기 전의 시간을 이용하여 까농 앙글레에게 말했다.  저는 혼잣말하기를 좋아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분은 나의 전부요 나에겐 단 한 분이자 유일한 전부이신 분이다.” 이 영혼에게 베풀어 주시는 행복과 평화가 얼마나 멋진고.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신 분이라 나는 그분께 내 전부를 드렸다. 만약 이 세상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고독도 알고 공허까지도 알고 있다. 내가 고통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나의 빛나는 별이신 그분에게 늘 내 눈을 고정시켜놓고 있노라면, 오!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나는 넓은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그분 안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온통 잠잠해져서 평화롭기만 하다. 하느님의 평화란 정말로 좋은 것이다. 그것은, 바울로 성인께서 그 평화란 “모든 이해를 초월한다.”고 하셨을 때 뜻하신 바로 그 평화다.

10. 삼위일체께 바치는 기도

엘리사벳은 가르멜을 휘몰아치는 외부의 태풍이 그녀의 내적 평화를 방해하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본위적인 격리(隔離)가 아니었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가 할 일은, 자신에게 평화를, 하느님과 자신의 합일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고 이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 이 사태를 몰래 치유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폭력과 파괴의 세력이 악을 퍼뜨리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선과 사랑의 세력도 상당히 알려져 있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제 영혼은 교회를 위하고 관구를 위한 하나의 기도 안에서 당신의 영혼과 일치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끊임없이 그분의 기도와의 친교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
또 제 자신을 그 원천이신 생명의 샘에 있는 작은 항아리처럼 있게 하고 싶고, 마침내 무한한 애덕의 홍수가 넘쳐흐르게 함으로써 훗날 영혼들에게 그런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 영혼들을 위해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여 그 영혼들도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흠숭하올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들을 모두 우리 자신의 것이 되게 합시다. 그렇습니다. 영혼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삶의 풍요로움을 지니는 한, 우리 모두가 한 몸의 지체들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교회라는 큰 몸체 안에서 그것을 전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슈비냐르 수사에게 쓴 이 편지에서 엘리사벳은 바울로 성인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분의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가 그 밖의 모든 것을 잊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서로 일치합시다. 그리고 바울로 성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영광의 찬미’가 됩시다.” 지나가면서 언급한 이 짤막한 구절은 그녀의 영성 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순절 초기에 엘리사벳은 기트와 죠르쥬가 첫 아기를 낳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 여자 아기는 3월 11일에 태어났는데, 그 이튿날 저녁 오락시간에 제르메느 원장은 죠르쥬 - 그는 썩 훌륭한 아마추어 사진사였다 - 가 찍은 그 아기의 사진을 회람시켰다.
제부(弟夫)는 내 가슴이 얼마나 심하게 고동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엘리사벳은 회신을 보냈다. “그 아기의 영혼은 나에게는 착하신 하느님을 비추는 수정(水晶)처럼 생각되는 구나. 나는 그 아이를 보면 꿇어앉아 그 아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찬미할 거야.” 그런데 그녀가 그 귀여운 조카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부활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에 앞서 그녀는 성주간의 대 침묵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날 밤의 대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주님을 지긋이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날 밤 그분은 우리를 무척 사랑해 주셨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격자창을 통해서 감실의 작은 문을 흘끗 볼 수 있었다. 난 혼잣말을 했다. ‘내가 거룩하신 포로의 포로라는 것은 정말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포로인 것이다! 나의 지평(地平)은 넓어지고 있다... 나의 하늘은 그지없이 고요하고 별로 가득 차있다. 복자 십자가의 성 요한 신부가 영혼의 노래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조화로운 고독”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가지셨고 나를 가르멜 산 위에 따로 떼어놓아 두셨으니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이 아니신가. 그것은 어린 양을 따라 천국에서 노래하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내 영혼 안에서 불리고 있는 감사의 찬미가이다!

부활축일이 되자마자 행복한 할머니, 카테즈 부인은 그녀에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아기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엘리사벳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따뜻한 엘리사벳은, 자신이 혼자 수녀원에 있으니까 어머니가 느끼는 외로움이 때로 자신의 심장 주변에 있는 얼음처럼 사무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사벳의 어머니에게는 이 새로 태어난 꼬마 엘리사벳이 자신의 딸을 하느님께 바친 데 대한 보상을 백배로 되돌려 받는 셈이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친할아버지인 슈비냐르 씨가 손녀딸과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잠간밖에 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그 다음 달에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슈비냐르 집안은 자식이 아홉이었다. 딸 넷은 수녀가 되었고 아들 하나는 사제가 되었다. 엘리사벳은 이모 엘리사벳을 따라 디죵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갔고 80세가 넘도록 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5월 28일, 엘리사벳의 “영적 형제”인 보비 수사가 서품을 받았고 그 다음 날 첫 미사를 드렸다. 성 제르메느 축일인 6월 15일에 공동체는 원장수녀의 영명축일을 축하했다.
그날은 쉬는 날로서 수녀들은 원장에게 줄 작은 선물들을 만들고 원장은 그 선물을 공동체의 친구들에게 주는 것이다. 가르멜산 성모 축일인 7월 16일이 지나면 이어서 7월 29일은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다. 이날 흰 베일을 쓴 수녀들(이들은 성무일도를 바치지 않았고 또 수녀원 내부 일을 맡아했다)에게는 휴가를 주었고, 부엌일은 수련 수녀들이 맡아 했다.
이때 수련자로는 엘리사벳 밖에 없는 듯해서, “나의 아녜스 수녀님”이라고 엘리사벳이 불렀던 예수마리아의 아녜스 수녀 (엘리사벳보다 4살 위이며 서원을 한 수녀였다)가 엘리사벳을 도와주었다. 아녜스 수녀는 예술 감각이 뛰어났고 글씨체가 고전적이고 둥글둥글하며 반듯하고 아주 아름다워서 그 전 해 사순절 동안 엘리사벳을 도와 그녀의 지독한 악필(惡筆)을 고쳐주었고 그러는 동안 이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윗과 요나단이라고 하며 웃었다. 성녀 마르타 축일을 위해서는 엘리사벳은 요리사가 되었고 아녜스는 물품 조달자(調達者)가 되었다.
기트는 언니의 요리사로서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도와주러 와서는 생계란을 대주었고 기트의 요리사인 화니가 마련한 엄청난 양의 러시아 샐러드를 공급해주었는데 그들은 그 샐러드도 이튿날까지 먹었다. 엘리사벳은 요리용 냄비와 야채로 무슨 놀라운 일을 했노라고 말해서 수녀들을 기분 좋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나, 소화불량에 걸리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엘리사벳은 롤랑 이모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모들이 좋아했던 공동체 생활의 단편(斷片)을 다시 한 번 나누었다. “저는 부엌 난로 옆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데레사 성녀처럼 조리용 그릇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서 황홀경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저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심을 믿었고, 막달레나가 인성(人性)의 베일 안에서 만나 뵌 그분을 제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경배했습니다.”
9월 26일, 엘리사벳은 10일 간의 개인피정을 가졌다. 그녀가 서원한 이래 처음 하는 개인피정이었다. “나는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 10일 간의 완전 침묵, 철저한 독거(獨居), 그리고 내 베일은 낮추고 추가로 하는 몇 시간의 기도... 참 매력적인 일정이다.” 또한 그 피정은 그녀에게는 엄청난 은총의 시간이었다.
어떤 은총이었는지는 그녀의 비밀로 남아있을 터이지만, 그 즈음 제르메느 원장에게 간 엘리사벳의 목소리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보려 애쓰지만 뜻대로 안 되는 듯, 그저 두 눈을 빛내면서 다음과 같은 말만 간단히 할 수 있었다, “그분이 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계셔요.”

엘리사벳이 피정에서 나온 지 며칠 지난 10월 10일, 제르메느 원장의 임기가 끝났다.

엘리사벳은 서원 후 3년이 지나 수련자로부터 공동체로 옮기기까지는 총회 수녀가 아니기 때문에 투표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흰 베일의 수녀들과 함께 성가대석 앞 공간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제르메느 수녀가 차기 원장으로 다시 선출되었고 성삼의 마리 수녀도 다시 부원장이 되었다. 엘리사벳으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공동체가 망명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공동체는 그 다음 달에 도미니꼬회 수사였던 화제 신부에게 부탁하여 강론피정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대림시기에 임박한 때였기에, 화제 신부는 강론 주제로 ‘대림’을 택했는데, 이 주제는 엘리사벳에게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여러 장면을 다루었기 때문에 감동적이어서 그녀는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
화제 신부는 성령께서 마리아를 감싸주셨고 마리아는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기다리셨다는 “주의 탄생 예고” 주제로 여러 번 이야기를 되돌렸다. 신부는 그 이야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은총으로 자기 마음 안에 주님이 탄생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 속에 기다린다는 것과 연결지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생명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다면, 여러분이 요구하는 바를 명확히 말하시라. “하느님의 성령이시여, 당신께서 이 혼돈의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당신께서 동정녀 마리아께 우리 주님을 잉태하게 하시기 위해 내려오신 것처럼, 저에게 내려오소서. 라고. 여러분은 말씀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기를 원하시는가? 여러분은 주님의 육화(肉化)가 여러분 안에서 열매 맺기를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성자(聖子)를 인간의 몸에 잉태되게 하셨고 동정녀의 모태 안에서 자라게 하셨다. 자 그렇다면, 그분을 여러분 안에 사시게 하고 자라시도록 하는 분은 역시 그분인 것이다.

이러는 동안 성령은 엘리사벳 안에서, 또 그녀의 기도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고 계셨다.
제르메느 원장은 그녀의 기도가 훨씬 더 단순해지고 집중되어 있었으며 깊어져가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분을 언제나 계속해서 바라보라. 계속 침묵하라.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이 침묵은 소리가 없다는 것보다 훨씬 더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깊은 내적 침묵이었는데, 이때는 자신의 목소리는 침묵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이 이야기하고 있는 때인 것이다.
아녜스 수녀의 말에 따르면, 수녀들 중 몇몇은 가끔 엘리사벳의 그 외곬의 영성이 좀 지루하다고 보았다. 같은 생각이 그녀의 여러 시(詩)와 대화 안에서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아녜스 수녀는 말했다. “엘리사벳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모든 다양한 모습 중 얼마 안 되는 범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풍요로웠다. 왜냐 하면 확실히 엘리사벳은 위대하고 핵심적인 신앙의 신비에 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그 삼위일체의 삶, 즉 그녀가 생각하는 “삼위”의 사랑 넘치고 한없이 풍요로운 삶의 광대무변함 안에 푹 잠긴 채, 하느님의 바로 그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성령을 쏟아주시는 가운데 당신의 삶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그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에 자신을 내던졌다.
이른 바 천국조차도 품을 수 없는 그분이 실제로 오셔서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는 그 심오한 신비를 참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열어 보이셨던 생명의 높이와 길이, 넓이와 깊이를 우리가 속속들이 규명하기에는 영원을 가지고도 충분치 못하다. 엘리사벳이 스스로 말하기를 좋아했던 것처럼, 그녀의 지평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지평이었기에 그녀의 지평은 무한대였던 것이다.
공동체 피정이 끝난 다음 날, 엘리사벳은 스스로 이것을 자신이 쓴 가장 아름다운 기도에 담았다. 그날은 1904년 11월 21일. 성전에서 성모님이 자헌(自獻)하신 축일이요, 공동체는 자신들의 서원을 갱신하는 날이었다. 그날의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엘리사벳은 수방에 가서 자신의 노트를 한 장을 찢었다. 그녀의 “은총의 책” (모든 가르멜 수도자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공동체 기도용 작은 책) 크기와 같아지도록 그 종이를 반으로 접어들고, 그녀는 자신의 기도문을 한 자도 고치는 일 없이 써나갔다.

오 주님, 흠숭하올 삼위일체이시여. 저를 도와주시어 제 자신을 온전히 잊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미 영원 속에 있는 것처럼, 변함없이 그리고 조용히, 당신 안에 뿌리내리게 해주소서. 저의 영원불변하신 임이시여, 그 어떤 것도 제 평화를 방해하거나 저를 당신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해주시고, 당신의 심원한 신비 속으로 저를 더욱더 깊숙이 스며들게 해주소서. 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시고, 저로 하여금 당신의 천국,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본향, 당신께서 쉬실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 홀로 그곳에 계시도록 두고 떠나는 일이 없게 하시고, 그곳에서 신앙을 살면서 오로지 흠숭하며 온전히 몰입하게 해주시고, 당신의 창조사업에 시원스레 몸을 맡기게 하소서.
오,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하올 그리스도님, 저는 진정 당신 성심의 신부가 되고 싶사옵니다. 저는 당신을 영광으로 감싸고 싶고...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싶사옵니다. 그러나 제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저는 압니다. 하오니 간청하옵건대 당신으로 옷 입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제 영혼이 당신 영혼의 움직임과 같이 움직이게 해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저에게 몰두해 주시고 저를 소유해주시며 당신께서 저를 대신해 주소서. 그리하여 제 삶이 그저 당신 삶의 그림자가 되게 하소서. 흠숭 받자올 분이요 회복시켜주시는 분이며 구원해주시는 분으로 제 안에 들어오소서.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인 분이시여, 당신께 귀 기울이면서 제 삶을 살고 싶사옵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부터 배우기 위해 제 자신을 온전히 열어두고 싶사옵니다. 모든 밤을, 모든 부족함과 유약함을 거치며 언제나 당신과 함께 머물고 싶사오며, 당신의 타는 불빛과 사랑 겨운 별님 아래서 살고 싶사옵니다.
하오니 저를 황홀케 하시어 당신의 빛살을 벗어나 헤매는 일이 결코 없게 해주소서.
타오르는 불꽃이신 사랑의 성령이시여, 제게 내려오시어 저를 이른 바 말씀의 육화(肉化)가 되게 하소서. 다시 말씀 드리오니, 저로 하여금 또 하나의 인간이 되게 하시어 그 또 하나의 인간 안에서 그분이 그 신비를 다시 한 번 살게 하소서. 성부님, 또한 당신께서는 당신의 미약한 작은 피조물을 내려다보시어 당신의 그림자로 그 딸을 덮어주시고 당신이 오직 기뻐하시고 사랑해주시는 그분을 그 딸 안에서 뵈올 수 있게 해주소서.
오, 저의 “삼위”이시며 저의 전부이시고 저의 행복이시자 영원한 고독이시며 저를 넋 잃게 만드시는 무한하신 분이시여, 저를 당신의 전리품(戰利品)으로 바치옵니다. 당신 자신을 제 안에 빠뜨려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당신의 빛 안에서 당신 위대하심의 끝없는 심연을 영원히 바라보게 될 때까지 당신 안에 푹 빠지게 하소서.

이것은 기도의 은총을 위한 기도인데, 하느님께서는 상당부분을 이미 그녀에게 응답하셨다. 그것은 그녀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아주 깊은 심연 속에서 살아온 기도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기도에 나오는 많은 절구(節句)는 그녀가 그동안 깊이 생각해서 기도해왔으며 그 후 여러 번 글로 썼던 것들을 단순히 되뇐 것일 따름이다. 원래 그것은 하나의 자화상이지만, 하느님께서 앞으로의 몇 달 동안에 더욱 닮은 모습으로 만드시려 한 자화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