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노래

영혼의 노래 (십자가 성 요한) (2)

할미 아녜스 2007. 11. 20. 21:10


 

머리말


원장 수녀님,

이 노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어떤 특수한 열정으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란 참으로 광대무변하며 지혜서에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쳐진다.”(지혜 8, 1)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가르침을 받고 움직여지고 있는 영혼은 이 사랑과 같은 풍요로움과 열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풍요로운 사랑이 영이 이 노래에 불어 넣어준 깊이와 부 모두를 여기서 설명하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가사와 같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지식으로 이야기한 사랑의 말을 보통 말로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오히려 어리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나약을 돕는 주의 영이 우리 안에 사시고 성 바울로의 말씀처럼 우리가 자신도 바로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 도 없는, 따라서 똑똑히 표현도 못하는 것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로마 8, 26)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영이 당신의 거처로 삼으신 사랑에 타는 영혼에게 알려주는 것을 누가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이 받는 느낌을 누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에게 품게 하는 소원을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아무도 그것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그 영혼조차도 할 수 없음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혼은 상징이나 비교나 비유를 써서 자기가 느낀 것을 다소 말하고, 그런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풍요로운 영에서 신비적 비밀을 넘쳐 나오게 합니다. 이 비유들은 거기에 포함되었음을 이해하면서 사랑의 영의 단순함으로 읽지 않으면 이치에 맞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리석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아가와 혹은 그 밖의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성령은 깊은 뜻을 평범한 일상 쓰는 말로는 나타낼 수 없기에 이상한 상징이나 비유를 써서 그 신비를 기록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 학자들이 아무리 주해를 거듭해 보아도 이 내용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것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설명한 것은 흔히 거기에 포함된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2. 그러므로 풍요로운 신비적 지식으로 충만한 사랑의 역사하심으로 지은 이 시들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고 내가 의도한 바도 그것이 아니며 다만 일반적으로 얼마간의 빛을 주는 것뿐입니다.(수녀님도 또한 그렇게 원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말은 각자가 자기 영성의 양상, 또는 자기 정신의 능력에 따라 이용할 수 있게 아주 넓은 뜻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영혼의 구미에 맞지 않는 한정된 뜻으로 그것들을 정리하는 것은 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설명을 시도해 보기는 하겠지만 그 설명에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깨우쳐진 신비적 지혜는 (이 시 안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지혜이지만) 영혼 안에 사랑과 애정의 효과를 내기 위해 명확히 이해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의 경우와 같아서 우리는 이해하지 않고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3. 따라서 나는 아주 간결하게 말 할 예정입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문제 자체가 다소 상세히 설명을 요구할 때와 또는 기도의 효과에 관해서 논하거나 설명해야 할 기회를 만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예사롭고 일반적인 것은 접어 두고 하느님의 은혜로 초심자의 단계를 이미 벗어난 이들을 위해 더구나 이상한 현상을 짤막하게 말 할 참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초심자를 위해 서술된 것은 이미 많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을 내가 기록하게 된 것은 수녀님의 청에 따라서인데 주님은 수녀님에게 초심자의 영역을 벗어 날 은혜를 주셨고 더욱이 수녀님을 신적 사랑의 품속으로 더욱 나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내적 교류를 말하자면 아마도 스콜라 신학에서 몇 가지 점을 다루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순수 영적 사정에 관해서 내가 이러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 헛된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가령 수녀님에게는 신적 진리를 터득케 하는 스콜라 신학 수업이 없더라도 사랑으로 가르침을 받는 신비 신학의 수업은 부족하지 않을 테니까, 후자에 따르면 단지 초자연적 진리를 알뿐만 아니고 동시에 그것을 맛보게 됩니다.

  


 4. 나는 내가 말하는 모두 - 그것은 나는 나보다도 뛰어난 판단력을 갖춘 분들의 판단에 복종하겠으며 도한 어머니이신 성 교회의 판단에는 절대 복종하는 바입니다. -를 더욱 믿을 가치가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나 자신의 체험이나 또 영적 분들과의 접촉으로 알게 되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고 나 스스로 판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나는 이 두 도움을 빌릴 예정이긴 합니다만) 나는 다만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여 거기서 확증과 해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어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경우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쓸 예정입니다. 우선 라틴어에서 번역한 원문을 쓰고, 그것을 내가 다루는 문제에 적용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시작에 노래를 모두 정리하여 기록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 노래하나 하나를 순서를 따라 열거면서 설명하고 또 노래의 각 구절을 서두에 기록하고 설명하겠습니다.


주,  ‘라틴어에서 번역한 원문’ -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예수의 안나 수녀를 위해 처음 쓸 때는 라틴 원문을 쓰지 않고 번역문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