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쿠리속의 이야기

[샘터글]찬 바람만 불면 찾아오는 그녀

할미 아녜스 2005. 11. 18. 21:32
      과거, 추억 속 불륜인가 아름다운 회상인가? 모닥불 같은 그녀, 찬바람만 불면 찾아오는 불청객 과거, 추억 속 불륜인가 아름다운 회상인가? 임윤수(zzzohmy) 기자 살갗을 스치는 찬바람과 함께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그 때 그 여인이 모닥불처럼 입김 내뿜으며 그림자같이 스며듭니다. 바람에 실려 온 그녀에 대한 애틋함이 지나간 날들을 그립게 하고 그 여인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 때 그 여인, 너무 오랫동안 소식조차 없어 외형마저 희미하고, 생사까지 불분명해 과거의 존재로만 기억할 뿐 근황조차 모르고 있는 그런 여인입니다. ▲ 찬바람이 부는 초겨울이면 불청객처럼 모닥불 같은 그녀가 찾아옵니다. ⓒ 임윤수 그 때는 그 여인 때문에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사랑임을 알기에 너무나 마음이 아파 가슴을 부둥켜안고 불 맞은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뒹굴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그 여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고, 생채기에 소금물이라도 퍼부은 듯 쓰리기만 했습니다. 한번 끓어오른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열병이 되었고, 보고픔에 한 번 흔들린 마음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혼신이 몽롱하도록 구석구석을 싱숭생숭 흔들어 놓기 일쑤였습니다. 그때는 그녀 때문에 바보가 되었고, 염치 모르는 뻔뻔한 인간도 되었었습니다. 그녀를 생각하면 공연히 슬퍼져 눈물을 찔끔거리다가도, 상상으로나마 살갗 닿던 그 짜릿한 순간을 떠올리면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듯 시실시실 웃음 흘리니 싱겁고 쓸개 빠진 그런 인간이 되곤 했었습니다. ▲ 그때 그녀를 돌아보는 게 추억 속 불륜인지 아름다운 회상인지는 굳이 구분하지 않으렵니다. ⓒ 임윤수 그녀는 찾고자 하는 파랑새가 되기도 했고 건너고 싶던 무지개다리가 되기도 했지만, 살얼음처럼 조심스럽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 겨우 살아 있어 가물가물 불빛 밝히는 큰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위태한 그런 존재였습니다. 내게 있어 그때 그 여인은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만드는 선악과(善惡果)와 같은 애매모호한 그런 존재였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데일 것만큼 뜨겁기에 머뭇거리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멀어질 듯하면 가슴에 찾아드는 한기 때문에 얼어 죽을 듯 춥기만 하니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하는 진퇴양난의 지뢰밭 같은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이렇듯 찬바람이 불 때, 양지 찾아 해바라기하며 사색의 늪에 발을 담그면 그녀의 잔상은 어김없이 펄처럼 밀려와 온몸을 빨아들이는 그런 늪지였습니다. 손가락에 군살 박히도록 깨작거리는 연필심을 끌고 다니는 스케치의 모델도 그녀였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언제나 감춰진 듯 형체가 그려지지 않는 오묘한 술래였을 뿐입니다. 아파했던 마음, 데일 만큼 뜨겁던 마음을 색깔들로 칠해 보려 하지만,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 들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소리처럼 어떤 색깔로도 그려지지 않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 여인 때문에 너무 행복했고 즐거웠습니다. 생각만 해도 입가엔 그냥 바보처럼 실실 웃음을 흘렸었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녀를 만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지루함도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도 그녀만 생각하면 그녀의 얼굴이 휘영청 밝은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올라 밝은 불빛이 되곤 했었습니다. ▲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그녀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 임윤수 행복은 만유인력을 증명한 뉴턴의 사과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별똥별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복으로 다가왔고 소낙비처럼 온몸으로 젖어 들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열일곱, 열여덟 살 때 삭아버린 여드름처럼 지나간 추억이려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에 대한 뜨거움이나 설렘도 정월 대보름날 쥐불놀이를 하며 돌리던 깡통 속 관솔불처럼 그 나이, 열일곱, 열여덟 살에만 활활 타오르던 그런 뜨거움이며 설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움과 아픔은 활활 타버리고 마는 관솔불이 아니라 은근히 불기 머금고 있는 잿불이었던 모양입니다. 훅하고 불어오는 찬바람에 잿불처럼 일어난 그녀의 그림자, 형체 없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상흔처럼 아파오고 환상처럼 아련한 행복감을 가져다줍니다. 아프지만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고, 행복하지만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벌집이라도 쑤셔놓은 듯 머리와 가슴을 온통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몽정의 끝에서 느끼던 그 허무함과 갈등이라도 재현되는 듯 그때의 짜릿함과 당혹감이 감춰진 비밀처럼 잠자리 뒤척이게 합니다. 첫정을 나누던 그때의 숨 막힐 듯한 설렘과 기대감, 심장을 뚫어버릴 것 같은 거친 숨소리,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처럼 찾아든 그 나른함이 찬바람에 섞여 환희와 고뇌의 양면으로 가슴과 머리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연정이나 가슴에 두 방망이질 하는 설렘은 사춘기나 처녀총각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일 먹어도 춘정은 솟고 연정 또한 멈추질 않습니다. 생존의 공통분모,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생태계의 순리처럼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뜨거움은 이성간의 공통집합쯤 되는가 봅니다. ▲ 나일 먹어도 아픈 건 아프고 그리운 건 그립습니다. ⓒ 임윤수 서툴다 못해 무모하기조차 했던 그때의 그 설렘과 뜨거움이 변색 된 컬러, 변형된 모습으로 찾아들었지만, 그 때의 뜨거움은 지금도 뜨겁고 그때의 아픔과 기쁨은 지금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아프고 기쁜 무엇인가로 다시 찾아옵니다. 유한한 인생에 한이 남지 않도록 가슴 후련히, 지금이라도 후련함에 눈물 흠뻑 젖도록 고백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 고백이 물레방아 돌리는 낙수가 될지언정, 미련 남지 않게 흠씬 통곡이라도 하듯 고백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차마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고백은 혀 놀림을 통해 입술을 벗어나는 순간 죽어버리는, 아무런 감정도 없고 의미도 없는 한낱 초겨울 찬바람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그녀는 나에게 '가슴 따로, 머리 따로'를 요구합니다. 머리로는 '아닌데'를 말하지만 가슴으론 머뭇머뭇 다가서니, 그때나 지금이나 머리와 가슴을 분리시키는 혹독한 아픔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 거미줄에 걸린 낙엽처럼 망상의 그늘에 그때 그녀를 거니 모닥불처럼 가슴이 따뜻해 옵니다. ⓒ 임윤수 오늘 하루도 나는 번뇌의 망상에 허우적대는 찰나의 자아를 희롱하며, 그렇게 힘들고 고뇌 가득한 그런 하루를 보낼 겁니다. 움켜쥔 주먹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도록 나를 흥분시키던 그녀에 대한 잠상, 아픔보다 더한 자극으로 다가오던 그 짜릿함의 망상에 걸려 허우적대는 그런 하루를 보낼 겁니다. 초겨울만 되면 찬바람을 타고 찾아오는 그 불청객, 이런 망상을 중얼거리니 어떤 이는 주책이라 말할 거며, 어떤 이는 나잇값 하라고 점잖게 충고도 할 겁니다. 그러나 살점을 도려내는 혹독한 꼬집힘을 당해도, 체면 때문에 본성 숨긴 채 손가락질을 해대는 몇몇 어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나는 기꺼이 그때 그 여인을 그리워하며 추억 속 불륜이든 아름다운 회상이든 모닥불을 쬐듯 기억을 유희하렵니다. ▲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 끝엔 불륜도 회상도 아닌 찬바람만 다가옵니다. 불청객처럼 찾아들어 자판을 토닥거리게 하는 불륜의 대상, 아름다운 회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당신, 세월과 찬바람을 함께 기억하는 임이며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입니다. ⓒ 임윤수 '지금'이라고 하는 당장도 머지않아 과거가 되고 지나간 시간들이 될 것이기에 그때, 찬바람이 불지 않아도 가슴 시려온다는 노년에 모닥불처럼 가슴 따스하게 덥혀줄 그 꺼리를 만들기 위해 추억 속 불륜이 되든, 아름다운 회상이 되든 꺼내보고 돌아볼 수 있는 과거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아~' 나이를 먹어도 아픈 건 아프고 그리운 건 그립습니다. 설렘도 그렇고 행복과 기쁨도 결코 나이를 먹었다고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그때 그 여인, 초겨울이면 불청객처럼 찾아들어 잠자리 뒤척이게 하는 불륜의 대상, 아름다운 회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당신, 세월과 찬바람을 함께 기억하는 임이며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