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잎 끝마다 이슬이
오후 4시도 못되었는데
산그늘이 으스스 운동장을 건너간다.
그렇게나 곱던 앞산 뒷산과
운동장가 벗 나무 단풍이 다 졌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쌀쌀한 바람이 분다
몇 개 달린 벗나무 이파리들이 추워뜬다.
썰렁한 초겨울이다.
교실에 앚아있는데 교장선생님이
화분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작은 플라스틱 회색 화분인데
화분위로 초록의 풀잎들이 소복하게 자랐다.
웬 풀이냐고 했더니
보리다.
세상에 보리가 화분에서 예쁘게 자란 것이다.
을시연 스러운 초겨울날
초록의 보리잎들이 가슴에 박힌다.
보리는 꽁꽁언 땅위로
파란몸을 내 놓고 겨울을 지낸다.
유리창가에 화분을 놓았다
빈논 하나없이 들 가득 보리를 갈아
보리잎들이 파랐게 자랄때 쯤이면
동무들이랑 곶감서리를 가기도하고
달빛을 차며 술집이 있는 이웃마을로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이웃마을 처녀들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어느날 동무들과 술을 마시고
달빛가득한 들길을 건너
집으로 가고 있었다.
달빛속에 어린잎들이
시린몸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달빛새든 방에 엎드려
"보리씨"라는 시를 썼다.
달이 높다
추수끝난 우리나라
들판길을 홀로 걷는다.
보리씨 한알 얹힌 흙과
보리씨 한알 덮을 흙을
그리워 하며
나는 살았다.
이 글을 쓰다가 다시 화분을 본다
어? 그런데 저게뭐야?
파란 보리잎 긑에 작은 물 방울 같은 것들이
반짝인다
깜짝 놀라다가 가보니
세상에 이게 뭔가.
해지고 산그늘 내리면
풀잎끝에 맺히는 저녁 이슬방울들이다.
스므마지기 농사를 지으면 일년에
92만원을 까 먹는다는 저 텅 빈들,
농민들이 죽어간다
파란 보리잎 끝마다 영롱하게 달린
이슬방울들은 차디차게
언 농민들의 애처러운 눈물같다.
***김용택 시인의 가을편지 연재 마지막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