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편지"
꽃 핀다 저 꽃들 좀 봐라.
봄 여름에 피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이 가을 다 꽃 핀다.
산골 논, 다랑이 봇 도랑, 물길을 따라 고마리 꽃들이
울긋불긋 피어난다.
고마리 꽃 옆에 물 봉선화도, 여뀌꽃도 피어 붉고
물 봉선화 꽃을 따라 쑥부쟁이 구절초 꽃도 피어난다.
가을 꽃 중에 꽃 구절초 꽃,
구절초 꽃 피면 가을 오고요
구절초 꽃 지면은 가을 갑니다.
내 시(詩)가 되어 준 꽃,
강가에 핀 꽃 서러운 누이같은 구절초 꽃,
그 꽃들 속에 짙은 남색 달개비 꽃도 피어 났구나.
고부간에 갈등 이야기가 얽힌 가시가 무서운
며느리 밑씻개 꽃도 꽃이어서 눈이 시리고
며느리가 밥을 먼저 먹었다고 쫓겨나 죽은 무덤에
피어 났다는 며느리 밥풀꽃도,
흰 밥티 두 개를 붉은 혀에 물고 어여쁘다.
섬진강 강가 푸른 가을 하늘아래 뛰노는 덕치 초등학교
2학년 우리 반 아이 세명,
너희들도 이 가을에 피어난 꽃이 아니더냐!
밤톨같은 선영이, 세침뜨기 유빈이, 앞니가 다 빠진 채훈이,
너희 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으랴.
엊거제 본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도
순정의 사내는 기왕 죽을거면
그녀와 살다 죽겠다고 울부짖더구나.
그 울음 또한 이 가을 꽃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꽃들 만발한다. 만발한 꽃들이 울긋불긋 얼씨구나
그렇게 한 동네를 이루는구나
아! 이 짧은 지면으로 이 나라 가을 꽃들을 어찌 다 부르랴.
봄에 피는 꽃은 산그늘로 보아야 서늘하고
가을에 피는 꽃들은 아침 이슬 속에 영롱하게 빛난답니다.
그러나 가을 꽃 중에, 서산너머로 지면서 발광하는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 꽃이 있으니
저 억새들을 좀 보거라!
저 억새도 지금은 흔들리면서 꽃이다
그러나 우리 눈을 부시게 하는 저 꽃들만이 꽃이 아니다.
눈을 뜨고 마음을 조그만 바꾸면
이 가을 눈길 닿는 것 다 꽃이다.
마을 뒤안에 가지 가지마다 다닥다닥 열려 붉어지는
감도 꽃이요.
바람만 불면 밤알이 금방 떨어질 것 같이
벌겋게 벌어진 밤송이도 꽃이다.
길가에 보송보송한 검은 털끝에 영롱한 이슬을 달고 있는
수크령, 강아지 풀, 꽃같지 않은 오이 풀꽃도
짙은 밤색으로 피었구나.
눈 뜨고 보거라!
이 나라 산천의 가을 꽃 중에 꽃은 작은 산골짜기를 따라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이 꽃 중에 꽃이다.
저 샛노란 골짜기 벼들이야 말로 서럽고도 기쁜
우리들의 가을 꽃이다.
저 논, 저 벼없이 어찌 우리 꽃송이 같은 흰 밥 먹고
인생의 꽃을 고봉으로 피우겠는가!
-조선 일보에서 발췌-
사진: 정 종훈(달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