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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이여!

할미 아녜스 2005. 12. 14. 12:41

고드름이여!
시인 기형도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 'orphelin(고아) - Claude Jero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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