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별님·안병기

빗 방울의 소리를 들어라..

할미 아녜스 2006. 4. 13. 11:26
    빗방울의 노래를 들어라 무의식과 자의식 사이 안병기(smreoquf2) 기자 [2006-04-12 오전 9:32:22 ▲ 거미줄에 걸려 낙하를 멈춘 벚꽃잎들. 마치 처음부터 빈 나무가지에 피어 있었던 꽃잎같다. ⓒ안병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일찍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전혀 정치적인 고려가 가미되지 않은 발언을 한 바 있다. 만약 지금 시대에 그런 말을 했다면 전 세계 제과 업계의 집단 반발을 샀을 게 뻔한 말이다. 지구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 여자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몇년 전엔가 모 방송국이 그런 제목을 단 연속극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얼핏 보면 어리석기까지 한 질문 같아 보이지만, 그 '무엇으로'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안방에서 곤히 잠자고 있던 여자들의 욕구에다 불쏘시개를 집어넣는 바람에 '대한 남아 가는 길에 승리' 뿐이었던 우리나라 남자들의 가부장제가 온통 잿더미가 될 뻔했었다. 연속극을 빙자한 방화 행위였던 것이다. 누군가 '너는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누구처럼 빵으로 산다고 할까, 아니면 살기 위해 산다고 말해 버릴까. 나를 살게 하는 건 어쩌면 터무니없는 자의식(自意識) 나부랭이들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들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지닌 자의식이란 대부분 의식 과잉의 상태가 빚어낸 과장이다. 사람들은 확대와 왜곡이라는 두 단계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자신의 실제 모습을 부풀려서 생각하게 된다. '공주병'이니 '왕자병'이니 하는 것도 지나친 자의식이 빚어낸 말에 다름 아니다. 그 '왕족'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한 대가로 기꺼이 남들의 조롱거리를 자청한다. 적당한 자의식은 자존심을 지키는 무기이다. 그러나 정도를 지나치게 되면 소통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지피지기를 알지 못하니 백전백패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 학교 운동장 구석에 싸래기 눈처럼 떨어진 벚꽃잎. 벚꽃이 가진 이미지를 배제하고나면 저 집단적 순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안병기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물끄러미 창밖으로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습관처럼 빗방울을 세어 나갔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이렇게 빗방울을 세다가 어느 한 순간 숫자를 놓쳐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세어 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새 무심의 경지 한 복판에 서 있는 나를 느끼곤 했다. 내 의식 속에서 찌꺼기처럼 잠복해 있던 자의식들이 빗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그런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라고 이죽거린다고 하더라도 허허 웃어 넘겼을 것이다. 자의식을 버리면 이렇게 평화로운 것을 그토록 쉬운 것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가니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 중생인가. 빗방울은 무심이라는 '무기'를 가졌다. 그 무심함으로 단단하게 닫힌 땅의 자의식을 무장해제 시킨다. 땅의 자의식을 건들지 않으면서, 그 자의식을 우회해서 가만히 스며든다. 자의식을 건들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의식이 견고하지 않다면 굳이 남과 다퉈야할 이유가 얼마나 있겠는가. 자신이 가진 평화의 메시지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빗방울. 유독 자의식이 강한 그대는 어제 빗방울의 노래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