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봉쇄 밖에서의 청원자
-본당 사목-
4월인데도 날씨는 끔찍했다. 덥고 건강을 해칠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유행성 독감이 디죵을 휩쓸었고, 카데츠 부인도 그 독감을 앓게 되었다. 부인은 몹시 쇠약해져서 또다시 휴식을 취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고 이것은 보통 때 활동적이던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엘리사벳의 친구들 모임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엘리사벳은 4월 말 마리-루이즈 모렐에게 쓴 편지에 자신의 친구 중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마리-까롤린 델라구우뜨였는데, 엘리사벳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친구를 매우 사랑하고 있는데, 이 친구가 해군 장교와 결혼하기 위해 디죵을 떠나려고 해.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난 사이였어. 친구의 행복이 기쁘기는 하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우정이 끝나게 되어 유감이야.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사랑에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가르멜에 들어가기 전 2년 반 동안 엘리사벳은 기트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죠세프 죠르쥬씨가 이끌고 있는 어떤 본당 성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엘리사벳이 기뻤던 것은 이 성가대가 성 요셉 축일에 가르멜 성당에 가서 노래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그리도 자주 가있었고, 그보다는 곧 뒤따라가게 될 그곳을 가보게 되는 소중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카데츠 부인은 너무나 뜻밖에도 엘리사벳에 대한 가르멜 방문금지 조치를 6월에 풀어주셨다. 6월 20일 엘리사벳은 그 금지조치 이후 처음으로 가르멜 수녀원 응접실을 방문했고 그녀는 이 기쁨을 시를 써서 축하하였다.
오, 내 정배이시며 거룩한 친구이신 내 사랑,
예수님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만이 아십니다.
당신은 제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까요. 당신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감사하옵니다,
저는 그리운 수녀원에 돌아갑니다. 보십시오, 제 마음에 얼마나 기쁨이 넘치고 있는지.
좋으신 주인님, 저는 당신께 제 행복을 바칩니다.
"모든 것이 천상의 향기를 숨쉬고 있는 가난한 가르멜의 응접실에서 엘리사벳은 다시 한번 예수의 마리아 수녀님을 만났다. 그분은 꼭 3년 전에 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제 제2기 원장직을 맡은 것이다. 엘리사벳은 이번 방문에서 이 공동체에의 입회를 공식적으로 청원했다.
엘리사벳이 입회하기를 청한 이 디죵 공동체는 프랑스에 수도회가 처음 서는 시기에까지 거슬러 오를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 공동체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가경자 예수의 안느 원장에 의해 1605년에 창립됨으로서, 빠리와 뽕뚜와즈에 이어 세 번째 수녀원이 되었다.
그 공동체는 1605년 9월 21일 샤르보네리이 로(路)에 있는 작은 집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곧 수녀들의 수에 비해 너무 작아 1613년 쌍뜨-안느 가(街)에 있는 보다 큰 건물로 옮겼다. 그 공동체는 그곳에서 근 200년 동안을 번창해오다가 프랑스 혁명의 법 때문에 수녀들은 모두 흩어졌고, 1790년에는 공동체 생활이 끝을 보게 되었으며 그 건물은 종당에는 전쟁성(戰爭省)에로 넘어가 병영(兵營)으로 사용되었다.
교황권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1860년대에 이르자 빠리 가르멜 수녀원 부원장인 성삼의 마리이 수녀님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나머지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고 프랑스 및 이태리에서의 신앙 보전을 위해 바칠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해야겠다고 맹세를 했다. 애초에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집을 하나 세워보려고 했으나 결국 그 공동체는 디죵으로 가게 되어 거기서 1866년에 작은 집을 짓는 한편 빈 땅에 자신들이 쓸 새 수녀원을 짓기로 했다. 그리하여 1868년 7월 25일에는 건물 초석(礎石)을 축성하였고 곧 까르노 가(街)에서 수녀원을 창립했다.
엘리사벳이 입회를 청하던 당시의 그 수녀원은 점점 커져 번창하고 있던 때였고, 예수의 마리이 원장의 영도 하에 애정이 넘치고 서로 일치하였으며 열심인 공동체였다. 정말 지난 2, 3년은 입회를 원하는 많은 젊은 여성들이 줄을 이어 놀라울 정도였고, 그 공동체는 이들을 받아들이다 보니까 그 용량에 넘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마리이 원장은 수년 전에 마르가레트 마리 알라꼬크 성녀께서 예수성심의 환시를 받은 곳이었던 빠레에-르-모니알에 새 수녀원을 창립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일단의 지원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지원자들을 원장은 “봉쇄 밖에 있는 청원자"라고 부르고, 그들을 받아들일 새 창립 수녀원이 준비될 때까지 그들을 가르멜 정신으로 훈련시켰다.
응접실에서 원장은 엘리사벳에게 기도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권했는데 엘리사벳의 기도방법이 단순하고 완전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주님께서 그녀 안에 계시면서 주님의 계획대로 엘리사벳을 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아무 것도 하기 않는 것을 못 마땅해 했는데,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시는 그분께서는 그녀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해주셨던 것이다.
원장과 청원자 사이에 즉각적인 교감(交感)이 있었다. 그들은 영혼의 너그러움과 사랑의 광활함에 있어서 혈연과 같은 영혼들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마리이 원장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젊은이들을 인도하는 일에 오랜 경험을 가졌던 분이었기에, 엘리사벳 안에서 특별한 기도의 은총을 입은 어떤 존재를 간파했고, 그래서 엘리사벳을 디죵 가르멜을 위해서가 아니라 빠레에-르-모니알의 새 창립 수도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로 점찍었다.
엘리사벳은 자신이 가르멜을 방문하는 새로운 자유를 즐길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가족들이 바로 여름휴가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쥐라에 가서 시골의 평화를 만끽했고 카데츠 부인은 병에서 회복하게 되었다. 마리이-루이즈 모렐에게 보낸 편지에 엘리사벳은, 사막의 성조들이 겪는 고독 후에 얻는 은둔지(Thebaide)처럼, 쥐라의 분위기를 엘리사벳 자신의 은둔지라고 불렀다.
<우리는 지금 소나무 숲에 싸인 시골에 정말로 조그마한 은둔지(Thebaide)에 머물고 있단다. 그리고 우리는 온 종일 집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숲 속에 있으면 정말 좋거든.
책이 있고 또 할 일이 있어서 저녁식사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지.
네가 내 고독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마치 은둔자가 된 것처럼 살고 있는데도 조금도 따분하지 않단 말이야.
시골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 너무 좋아. 쥐라의 맑은 공기와 휴식은 어머니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어머니에게는 그 휴식이 참으로 필요했던 거야.
우리가 디죵을 떠날 때 어머니는 몹시 피로하셨거든. 어머니가 이렇게 많이 좋아지셔서 내가 얼마나 기쁜지를 아마 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쥐라를 방문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8월 17일에 그들은 계속해서 스위스로 가서 거기서 3주를 묵은 후 프랑스, 보스게 가(家)로 돌아와 이모 후그 부인과 함께 미러꾸우르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난해와는 달리 엘리사벳은 디죵에 돌아오기 위해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젠 가르멜을 방문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곧 “봉쇄장벽 밖에 있는 청원자들”끼리 새로운 친구 서클을 만들었다. 그 서클 안에는 결국 끝까지 입회하지 않은 마르게리트 갈로도 들어있었고, 1895년에 가르멜에 입회했지만 견뎌내지 못한, 그러나 계속해서 가르멜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마르테 바이샤르도 있었다. 엘리사벳은 그 친구 서클 내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이름인 마리-테레즈로 알려져 있었다.
또 하나의 친구, 마리이 부베레는 보다 넓게 활동하도록 인도했다. 마리이는 엘리사벳을 설득하여, 볼테르 가(街)의 담배공장 공원(工員)들 자녀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 청년클럽 운영을 돕게 했다. 그리고 이 클럽회원들은 성 베드로 본당 교리반도 도왔다. 이들 두 사람은 가르멜 성당 안에서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고, 첫 영성체를 하지 않은 아이들 가족을 방문하기도 했다.
엘리사벳에게는 어린이들을 끌어들이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솨 수르동은 엘리사벳보다 8년 손아래였는데 엘리사벳에게 푹 빠졌고, 엘리사벳이 맡고 있는 교리반과 청년클럽에 있는 아이들로서 교리를 좀 덜 깨우친 아이들은 하나같이 엘리사벳에게 매혹되어 있었다. 하느님을 향한 엘리사벳의 사랑이 엘리사벳의 모든 면에서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엘리사벳의 친구나 지인(知人)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린 아이들마저도 매료되어 스스로가 그런 비슷한 체험을 하고 싶어 했다. 엘리사벳은 유별나게 다재다능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힘과 자제력 안에서 그녀의 심오한 기도생활로 푹 싸여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엘리사벳은 엄청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기가 넘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엘리사벳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엘리사벳은 아이들이 하고 놀 놀이게임을 꾸몄고 아이들을 위해 그들이 즐거워할만한 게임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그런 놀이를 통해 그들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에로 이끌도록 했던 것이다. 엘리사벳이 너무나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의 주소를 숨겨야 했다. 숨기지 않으면 그들은 하루 종일 그녀 곁을 맴돌았을 것이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갈 때쯤이었는데, 그때 엘리사벳은 가르멜과 다시 접촉하여 리지외의 데레사 자서전을 한부 입수했다. 아기예수와 성면의 데레사는 2년 전인 1897년 9월 30일에 선종한 젊은 가르멜인이었다. 그 데레사가 15세라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가르멜에 들어가도록 허락 받았다는 것이 엘리사벳으로서 어찌 부럽지 않았겠는가. 데레사는 곁으로 보기에 평온무사한 삶을 산 후 24이라는 나이에 결핵으로 죽은 것이다.
데레사의 언니인 원장 아녜스 수녀는 데레사의 겸손한 성덕을 식별해냈고 데레사의 생(生)이 끝나갈 무렵에는 데레사의 삶과 영성 (데레사는 이것을, 영성적 초기단계의 길이라고 해서, 자신의 “작은 길”이라고 불렀다) 에 관한 이야기를 쓰라고 데레사에게 명했던 것이다. 수녀가 죽으면, 수녀원에서 다른 가르멜 수도원으로 회람, 즉 죽은 수녀의 삶을 기록한 짤막한 이야기를 보내는 것이 관례다. 소화 데레사가 선종하자,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은 데레사 자서전의 복사 본을 보낸다는 흔치 않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자서전을 일반 세상에 배포를 위해 발간했다. 그 자서전이 너무나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초판으로 2000부를 발간한 것이 6개월 만에 완전히 매진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엘리사벳의 글과 그녀의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데레사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사벳의 영성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두 젊은 여성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단순성에 있어서는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이 단순성이 특별한 행위 안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상생활 환경을 이용하여 그들의 희생적 사랑을 표현하게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데레사는 방법을 확장했는데, 엘리사벳은 그런 방법들 안에서 자신의 영성생활을 표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 대축일날, 데레사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했고 남은 삶 동안 자신이 계속해온 기도 안에서 이를 표현했다.
오 하느님, 복되신 성삼(聖三)이여,
저는 당신을 ‘사랑하오며’, 당신을 ‘사랑 받게’ 하옵고,
성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기를 원하나이다.
한 말씀으로 성녀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제가 무력함을 깨닫고 있사오니,
오 하느님! 바라옵건대, 당신께서 저의 ‘성덕’이 되어주소서.
제 목숨이 다하는 날, 저는 빈손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겠나이다.
주여, 저는 제가 한 일을 셈하시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우리가 한 모든 의(義)도운 일이 당신 눈에는 결점 투서이옵니다.
하오니 당신의 ‘의로움’을 제 몸에 입히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영원히 당신을 차지하게 되기를 바라옵나이다.
오, ‘지극히 사랑하올 임이시여!’
저는 ‘당신’밖에 다른 어떤 ‘옥좌(玉座)’도 ‘왕관’도 원하지 않사옵니다.
엘리사벳이 11월 말경에 쓴 자신의 봉헌 기도문에는 데레사의 영향이 곳곳이 스며들어있다. 제가 순교로 죽을 수 있도록 저를 당신의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프게 해드리는 일이 없도록, 당신을 거스르는 자유를 제게서 빼앗아주소서. 제 마음 안에서 당신을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을 뭉개어 뜯어내버리소서. 저는 언제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오며 당신의 은총에 언제든지 응답하기를 원하옵나이다. 저의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을 위하여 성녀가 되기를 바라오며 당신께서 제 성덕이 되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저의 유약함을 알기 때문이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오며 그 무엇보다도 저를 시험해주심에 감사드리나이다. 당신을 위해, 당신과 함께 고통 받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제 심장의 고동소리가 감사와 사랑의 외침이 되게 하소서.
데레사의 스타일은 어딘가 꽃으로 꾸민 듯한, 감상적인 경향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데레사 영성의 견실한 신학적 의미가,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비타협적인 철저한 자기헌신 (이것이 데레사의 “작은 길”의 바탕이다) 이 때로 감추어 질 수가 있었다. 이것에 비하면 엘리사벳의 스타일은 훨씬 적나라했으며 그러나 엘리사벳은 정확하게 데레사 영성의 핵심을 향하고 있었고, 자신의 내적 삶을 말과 글귀로 아주 잘 표현해 놓았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선배 수녀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런 언어들이 그녀 자신의 하느님 체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기 때문에 그 언어들을 그냥 쓰고 있는 것이다.
11월 말에 엘리사벳은 까르까손느 출신 식료 잡화상, 마리-루이즈 모렐에게 요셉 앙브리와의 약혼을 축하한다는 편지를 썼다. 엘리사벳은 마리-루이즈를 알게 된 것을 행복해했다. 그러나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다른 길을 선택해주신 것을 더욱 만족해했다.
그때에 엘리사벳은 디죵의 새 주교, 르 노르데 몽시뇰이 실시하는 피정에 참가하고 있었다. 르 노르데 주교는 그전 7월에 임명되었으나 2월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취임했고 곧 엘리사벳 가정과 친한 사이가 되었다.
1월에 카데츠 부인은 미사에 가는 중에 계단에서 넘어져 등을 다쳤다. 다행히 골절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심한 타박상을 입어 한 동안 누워있게 되었다. 1월 말에 엘리사벳은 예수회 신부님들이 실시하는 다른 피정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엘리사벳은 기도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풀 수가 있었다. 엘리사벳은 일기에, “당신께서 내 마음 안에 만들어주신 그 작은 방 안에서 살고 싶다고, 거기서는 내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을 체험하는 것이 그렇게도 잘 된다”고 썼다.
엘리사벳은 셰스네 신부님 (엘리사벳의 지정 고해신부인 골마르 수사신부님만큼이나 거룩하신 분이었다)께 다시 한번 고해성사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보다 확고한 지도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피정을 마친 다음 엘리사벳은 “어머니” (엘리사벳은 가르멜의 관례에 따라 예수의 마리아 원장수녀를 그렇게 불렀다.)를 만나러 갔다. 고맙게도 마리아 원장도 이제는 의지할 만한 기도안내를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벳은 피정에서 받은 은총을 사랑 겨운 기도 안에 축약 정리했다. 이 기도는 그녀의 영성생활을 요약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삶에 걸쳐 놀랄 만큼 일관된 것이었다. 데레사에게서 받은 감화가 거기에 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엘리사벳 자신의 것이었다.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속해 있으며, 제 유일무이한 ‘전부’로써 당신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옵니까! 당신께서 날마다 제게 오시오니 우리의 결합이 더욱 더 가까워지리. 이다. 저의 삶이 지속적인 기도의 삶이 되고 긴 사랑의 행위가 되게 하소서.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어떤 잡념도 심적 혼란도 없게 하소서. 주인이시여, 저는 침묵 안에서 당신과 함께 살고 싶사옵니다. 하지만 제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가 지금 이 세속에 있기를 원하시기에 저는 당신의 사랑을 위해 진심으로 제 자신을 내어놓사옵니다. 저는 당신의 작은 베다니아(역자 주 : 베다니아는 마르타와 마리아 및 그 오빠 라자로의 고향이며 예수가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키신 예루살렘 외곽의 작은 마을임)가 되기 위해 제 마음의 작은 방을 당신께 바치옵니다.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오니 오셔서 거기에 사시옵소서. 저는 당신을 위로해드리고 싶사오며 주님 당신을 위해 제 자신을 당신과 더불어 희생 제물로 바치옵니다. 저는 미리 모든 희생, 모든 시련을 받아들이고 저와 함께 계신 당신을 이미 느끼지 못하는 그것마저도 받아들이옵니다. 저는 오직 한 가지만을 청하옵니다. 늘 너그럽고 신앙심 깊게 해 주소서, 언제까지나. 저는 결코 되돌리고 싶지 않사옵니다. 저는 당신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싶사오며 당신의 은총에 언제든지 응답하고 싶사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을 위한 성녀가 되고 싶사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유약함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저의 성덕이 되어주소서. 혹시 제가 되돌려지게 된다면, 당신께 빌고 간청하오니, 제가 당신의 것인 동안에 저를 데려가 주소서. 저를 죽여주소서. 제가 ‘성질 고약한 당신의 귀염둥이’라고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마 곧 시련이 올 것이며 그때에 당신에게 바치는 이는 저일 것이옵니다. 주님, 제가 찾고 있는 것은 당신께서 제게 부어주시는 은총도 위로로 아니옵니다. 제가 찾고 있는 것은 오직 당신, 당신뿐입니다! 언제나 저를 보살펴주시고 제가 점점 더 당신의 것이 되게 해 주소서. 제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께 속하게 해주소서. 당신을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잘라 버리소서. 그리하여 제 모든 것이 당신 것이 되게 하소서. 제 심장의 고동은 그 하나하나가 사랑의 행위이옵니다.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엘리사벳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아있게 하소서.”라고 엘리사벳은 일기에 덧붙였다.
이 기도문이 특히 감동적인 것은 엘리사벳의 1월 27일자 일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일기에 엘리사벳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 마리이-루이즈 알로가 5일 후에 꽁플랑에 있는 예수성심 수녀원(the Sacret Heart Sisters)의 지원자로 들어갈 것이라고 썼다. 자기는 아직도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자기 친구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엘리사벳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친구처럼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당신을 위해 모든 것에서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나의 때는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뜻을 따르리라. 나의 하느님, 당신의 성의(聖意)가 언제나 내 뜻이 되어 지이다.”(D 156) 엘리사벳은 가르멜의 신체적 고독을 동경했지만, 그런 고독을 아직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이 어디 있든 간에 거기서 자신이 스스로 누릴 수 있는 마음의 고독을 주시옵소서라고 간청했다.
엘리사벳이 겉으로는 결코 내색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예민한 사람만이 눈치 챘지만, 엘리사벳의 마음이 그런 다른 방향으로 끌려 있을 때는 사교 무도회나 겨울철의 야회(夜會)가 그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착하신 주님, 제가 이런 친목회나 축하회에 갔을 때 저는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과 주님의 현존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지선(至善)하신 분이시여, 그것은 주님을 제 안에서 아주 많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런 친목회에 저처럼 하찮고 연약하나마 주님을 잊지 않고 있는 한 영혼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행복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D 138)
엘리사벳은 한 사람이 청혼해 왔지만 거부했다. 그녀의 반짝거리는 얼굴과 활기와 은근한 위엄에 끌려서 가까이해 보려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엘리사벳의 어린 시절의 친구였는데 이젠 훌쩍 성인으로 자란 샤를르 알로가 있었다. 몽뻴리에르의 주교, 브륭에 몽씨뇰 조차도 샤를르 알로가 디죵의 엘리사벳과 춤추었노라고 자랑까지 했지만, 엘리사벳의 친구 베르테 드 마씨악은 젊은 청년들이 적령기 아가씨들 무리를 찬찬히 살피면서 나누는 말을 엿들었다, “엘리사벳은 우리와 맞지 않아. 저 애 표정 좀 봐.”(LL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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