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엘리사벳의 지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엘리사벳은 처음에는 전례를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제가 연단에서 강복을 주고 있을 때 엘리사벳이 구유를 흘긋 보았는데, 거기 있는 것이 쟈넷트임을 알아보고는 발끈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외쳤다. “쟈넷트다. 내 쟈넷트를 돌려줘!” 당황한 유모가 성당 밖으로 엘리사벳을 서둘러 안고 나갔고, 그 집회는 웃음바다가 되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엘리사벳이 그 귀여운 인형을 팔에 꼭 껴안고 있었고, 성질이 나면 쉽사리 발끈하여 번들거리는 검은 두 눈을 부라린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 즉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
옥손느로 되돌아오자마자 카테츠 부인은 어머니 롤랑 부인(주: 엘리사벳의 외할머니)에게 잇달아 편지를 써서 엘리사벳의 성격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소식을 알려드렸다.
“엘리사벳이 봉헌송 때는 일어나서 십자가에 입 맞추었어요.” “그리고 십자가에 다다르기 전에는 십자가를 향해서 키스를 보냈어요. 얘는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제 인형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 마음에 우러나서 무릎을 꿇어요.’”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해설을 달았다. “얘는 정말로 작은 악마예요. 이젠 기어 다니기 때문에 매일 새 바지를 입혀주어야 해요. 귀엽게 옹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굉장히 기뻐하실 거예요. 이런 수다쟁이가 없어요.”
1882년 4월 말 카테츠 부인은 자신의 부모님들에게 편지를 쓴 다음, 엘리사벳의 손을 붙잡아 몇 마디를 더 썼다.
“사랑하는 린느 할머니와 몬드 할아버지, 오렌지 고마워요. 보보 (외할머니의 병(病)을 엘리사벳은 보보라고 했다)를 앓고 있는 린느 할머니를 위해 착하신 예수님께 기도드려요. 뽀뽀해드려요.”
이 편지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롤랑 부인(엘리사벳의 외할머니)이 돌아가셨고 그래서 사령관(외할아버지)이 와서 함께 살았다.
11월에 카테츠 대위는 새 임지를 받았다. 그래서 온 식구가 디죵으로 옮겨 뤼 라마르띤느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시절은 카테츠 부인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시기였다.
또 임신하여 6개월째 되는 때였기 때문이다. 2월 20일에 부인의 둘째 딸, 마르게릿트가 탄생했다. 엄마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사베트와 기트 (두 딸의 별명이다)는 성질이 정반대였다. 동생 기트는 조용하고 온순한데 사베트는 성질이 급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엘리사벳의 성품은 날로 거칠어져 갔다. 기트는 엘리사벳이 화를 낼 때는 아주 무서웠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사벳은 정말로 작은 악마였어요.” 한번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가 하면 문을 걷어차곤 했다. 또 어떤 때는 어머니가 엘리사벳에게 줄 작은 보따리를 싸놓고는 ‘착한 목자’ 수녀들에게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착한 목자’ 수녀들은 근처에서 교정(矯正)의 집(주: 버릇 고치는 집)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테츠 부인에게는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카테츠 대위가 심장병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위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카테츠 부인은 그의 건강을 염려해서 1885년 4월 28일의 편지를 썼다. “제 충고 말씀을 잊지 마세요. 몸조심하시고, 맥주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시고, 시가도 너무 많이 피우지 마세요. 건강이 제일이니 챙기시고, 우리를 생각해주세요.” 몇 안 되는 줄로 다섯 가지 ‘명령’을 한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엘리사벳의 남 눈치 보지 않는 성격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는가 하면 삶에 대한 사랑과 우정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
카테츠 부인은 멀리 있는 남편에게 아이들의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주었다. “애들은 행동거지가 그런대로 올바릅니다. 엘리사벳은 가끔 당신 생각을 하고 당신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 애는 날짜를 새고 있습니다.” 같은 편지에 아래와 같은 엘리사벳의 편지도 계속되었다. 이때쯤 엘리사벳은 짧게나마 자신의 글을 써서 어머니 편지와 함께 보낼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쟈넷트는 분명히 엘리사벳의 장난감이었다.
내 인형을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빠.
인형에게 씌워줄 크로셰 뜨개질로 뜬 작은 덮개를 받아서 참 기뻐 아빠 없이 지난지도 오래 됐어요. 뽀뽀를 드려요. 사촌들에게도.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엘리사벳은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아빠의 건강이 계속 나빠졌고 그래서 그해 6월에는 아빠가 군에서 퇴역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함께 두 해 동안 행복하게 지냈다. 그들은 대단히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이었다.
롤랑 사령관은 훌륭한 외할아버지이며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두 아이는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기어올랐고 외할아버지는 몇 시간이라도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두 아이는 성격이 아주 딴 판이었는데도 서로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자신이 성질을 부릴 때처럼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열정적이었다.
그들 가족이 디죵에 정착하고 나서는 시내에 있는 친구들 끼리(대부분은 군인들 가족이었다)서클을 만들었다. 이웃에 사는 귀마르 가(家)는 이미 친구집안이 되어있었고, 루드미랑드에 사는 셰르보 집안의 딸, 알리스는 엘리사벳 보다 거의 2살 위인데 엘리사벳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알로 가(家)와는 거의 매일 왕래가 있었다.
알로 사령관과 그 부인에게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중 마리이 루이즈는 엘리사벳보다 생일이 꼭 한달 빨랐고 샤를르는 두 살 밑이었다. 엘리사벳은 알로 부인을 “둘째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리 루이즈는 엘리사벳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두 집안은 언제나 서로 가깝게 지냈다.
아이들에게는 뛰어놀 수 있는 넓은 공원과 답사해볼 아름다운 시골이 가까이에 있어서 다행이었고, 엘리사벳은 새로운 일을 생각해 내는 데 항상 앞장섰다. 또 예전에 그들이 여러 곳에 배치되어가서 살면서 만들어두었던 친구들을 매년 방문하기 위해 여행을 했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친척들도 매년 방문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시기는 1887년 1월 24일에 롤랑 사령관이 죽으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이미 여러 번 심장마비를 겪었던 카테츠 대위가 10월 2일 일요일에 54살의 나이로 갑자기 타계했다. 엘리사벳은 아버지가 운명할 때 옆에서 임종했고, 10년 후에는 시(詩)를 써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내 약한 팔에 안겼네.
그 팔이 당신을 그렇게 껴안았네.
짧은 당신의 고뇌를 그 팔은 끝까지 견뎌냈네.
당신 삶의 마지막 투쟁을.
나는 붙잡아 보려고 애를 썼다네.
그 마지막 긴 한숨을.
카테츠 대위는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아왔다. 그래서 추도사와 신문에 실린 망자 약력에서는 그의 충직성, 성격적 고결성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에게 가졌던 애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군인 훈장을 수여받았고 1881년 1월 18일에는 명예 기사훈장(a Chevalier of the Legion of Honor)이 수여되었다. 본 추도사를 해준 쇄쩰르 대위는 그를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으로써 이런 모든 것을 가장 단순하고도 참되게 요약했다.
그가 죽고 나자 카테츠 부인과 두 아이들, “삼인조” (남은 자기들 세 사람을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에게는 큰 변화가 왔다. 카테츠 부인은 많이 줄어든 연금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편안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뤼 라마르띠느에 있는 그 큰 집이 이젠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곧 뤼 쁘리외 드 라 꼬오뜨 도르에 있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또 엘리사벳의 교육문제는 잘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엘리사벳이 벌써 7살이 되었기 때문에 새 집에 정착하자마자 카테츠 부인은 집으로 그레모 양을 불러들여 엘리사벳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했다. 또 엘리사벳은 첫 고해성사 준비를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엘리사벳은 첫 고해를 자신의 “변모”(conversion)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변모의 체험이 자신에게 하느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하는 하나의 정신적 충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사벳에게 그리도 소중했던 두 분의 죽음, 그리고 집을 옮기는 일대 변화도 자신의 불같은 기질이 어머니의 슬픔과 걱정을 매우 이겨내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사벳이 깨닫게 해주었음에 틀림없다.
엘리사벳은 애써 자신을 통제하기로 결심했고, 비록 살아가면서 오래도록 투쟁을 했었지만 그녀의 강한 의지의 힘 때문에 그 결과가 곧 분명하게 나타났다.
가족이 새 집에 정착하자 곧 카테츠 부인은 두 딸을 몇 주 동안 쉬게 했다. 그들은 샬롱에 있는 군 막사에 머물면서 군사 기동연습과 분열식을 보며 즐겼고 롤랑가(家)의 고향인 쌩 일레르에 가서 가족의 옛 친구이며 그곳 본당 사제인 까농 앙글르와 함께 한 때를 보냈다.
어느 날 저녁, 두 딸이 놀고 있다가 엘리사벳이 어느 사이에 놀이를 떠나 까농 앙글르의 무릎에 기어올랐다. 그녀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앙글르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숙이게 하고는 그 귀에다 대고 자신의 큰 비밀을 속삭였다. “까농, 난 수녀가 될 거야. 난 수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엘리사벳의 귓속말이 별로 조용한 소리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엿듣고 말았다.
“제가 바보 같이 무슨 소릴 하고 있어?” 어머니가 톡 쏘아붙였다. 이튿날 어머니는 너무 걱정되어 가까이 있는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까농 앙글르를 찾아가서 엘리사벳에게 진짜 성소가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다. 까농 앙글르는 엘리사벳을 아기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엘리사벳의 불같이 화를 내는 기질 그 아래에 숨겨져 있는 성격상의 심원(深遠)한 성실성까지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엘리사벳의 본당 신부는 “엘리사벳은 그 성품상, 천사가 되든지 아니면 악마가 되든지 할 거야.”라고 말했었다. 까농 앙글르는 엘리사벳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이미 간파했다. 그래서 까농 앙글르는 카테츠 부인에게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말했다. “예, 나는 엘리사벳에게 성소가 있다고 믿습니다.”
카테츠 부인으로서는 결코 듣고 싶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는 1870년 전쟁에서 그녀의 약혼자를 잃은 이래로 수도자 성소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다. 부인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쓴 저서들을 탐독해왔지만 엘리사벳이 수도자 생활에 뛰어든다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엘리사벳은 그때 겨우 7살이었다. 그 당시 그 또래들 중에는 수녀 되는 것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으나 실제로 수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부인은 세월이 가는 중에 엘리사벳이 그 일을 잊어주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한편 가족이 디죵에 돌아오자마자 엘리사벳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들을 위해 꾸며진 일련의 연주회가 있었다. 카테츠 부인은 엘리사벳을 거기에 넣어 피아노를 연주하게 했다. 엘리사벳은 슈타이벨트의 "로라쥬"(L'Orage:雷雨)를 풍부한 감정으로 멋지게 연주했고 그래서 심사관들의 주의를 끌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축하하러 엘리사벳에게 몰려들었으나 그녀는 어머니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내 연주 어땠어요?”
카테츠 부인은 주저하다가, 모든 사람들의 칭찬이 딸아이를 흥분시킬까봐 걱정되어 말했다. “괜찮았어.”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할 거야”라고 엘리사벳이 대답했다.
엘리사벳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어머니의 의견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엘리사벳에게 음악적 재능이 분명히 있는 것을 보고 카테츠 부인은 피아노 공부를 시키기 위해 그해 10월에 엘리사벳을 디죵 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 피아노 선생을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젠 엘리사벳의 나날들은 음악 교습과 장시간의 피아노 연습으로 꽉 차곤 했다. 음악학교에서 일반적 교습을 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집에서는 개인 교습을 시켰다. 다른 과목들에 대해서는 늘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의 일반교육은 대충하고 넘어갔고 그래서 그녀의 문법과 철자법 공부는 늘 제멋대로였다.
그렇지만 엘리사벳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앞으로 약 18개월 후에 있을 자신의 첫 영성체였다. 그녀는 이미 그 숭고한 날을 위해 혼자서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사벳이 잔소리를 들었을 때는, 신나는 감정과 기분 좋은 상태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험악한 대답을 억제하려고 입을 꽉 다물고 있다는 것을 가까운 친구들은 눈치 채고 있었다. 할 일을 친구들이 계획하고 있으면, 엘리사벳은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참고 있곤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엘리사벳이 기도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난폭하던 엘리사벳도 성당에 만 가면 곧 양순해지고 기도할 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1889년 새해인사로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엘리사벳이 세운 교정(矯正)계획에 포함된 그녀의 총명한 현실주의와 유머감각을 알 수 있다. 엘리사벳은 자신이 어떻게 성공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 확실한 울타리를 쳐놓고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꼭 약속하는데, 착하고 순종하는 딸이 될 것이고 어머니를 또 화나게 안 할게요. 더 이상 울지도 않을 것이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작은 모범생이 될 것입니다. 제 말 안 믿으시겠지요. 저는 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가끔 거짓말을 했지만 이젠 편지에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 머리 속에는 쓸 말이 많았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하지만 어쨌든 제가 아주 착해지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해 동안 좀 나아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에 보낸 편지를 보면 똑 같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에 그리 많이 울타리 치지는 않았다.
새해를 맞아 제 약속을 새롭게 하게 되어 기쁩니다. 새해에는 소원성취하시기 빕니다. 그리고 이젠 컸으니까, 얌전한 소녀가 될 것입니다. 인내심 있고 순종하며 성실하고 화내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이도 많아졌으니 동생에게 모범을 보여야겠지요. 동생과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예쁜 모범이 되어주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어머니들 중에 가장 행복한 어머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제가 곧 첫 영성체를 하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훨씬 더 착하게 행동하고 저를 더 착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 마르게릿트가 비슷한 음악적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엘리사벳이 다니는 같은 음악학교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가족은 친구, 친척들과 함께 긴 여름휴가를 계속해서 즐겼다. 까농 앙글르는 사벳트와 기트가 아름다운 시골에서 한 무리의 친구들과 함께 원기 왕성하게 등산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회상한다. “지금 생각이 나는데, 우리가 산으로, 숲 속으로, 들로, 그리고 강을 건널 때에는 언제나 엘리사벳이 선두에 서서 걸어갔었지요. 어머니만이 흘끗 본다든지 한 마디 말을 해줌으로써 그녀의 넘치는 힘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한편 기트는 숫기가 없고 내향적이며 신중해서 까농은 기트를 “판사”라고 별명 지었을 정도였다.
이 무렵, 아마 그 휴가를 지내는 동안에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카테츠 부인이 뱀에게 물려 몹시 앓았던 것이다.
이 사고는 부인의 안색도 모습도 바꾸어버렸고 부인의 건강에 종신토록 영향을 주었다. 부인이 44세 되던 때에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면 부인이 얼마나 늙어 보였는지를 알 수 있다.
디죵 집에 돌아오자 엘리사벳의 생각은 첫 영성체에 대한 기대와 자라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갔다. 엘리사벳은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수녀 놀이를 꾸며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어머니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드디어 엘리사벳이 첫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한 교리문답 교실에 들어갈 시기가 왔다. 그러나 학급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엘리사벳의 노력도 자신의 원기왕성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산책을 하고 있을 때 본당 지도신부가 화가 나서 엘리사벳과 그 친구를 얌전해질 때까지 보도에 꿇어앉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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