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과업을 계속 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부와, 다른 이들과 그리고 이 세상과 맺었던 그 관계를
그대로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피조물이 변형할 때 그리고 이 변형된 것을 나눌 때,
우리 자신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태도, 다른 이와의 형제적 친교,
또는 하느님이나 우리 형제 자매들과 만나기 위한 포용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노력하셨던 것을 위해 노력하고, 몰이해,
박해, 죽음과 부활 등 예수께서 겪으셨던 것을 기꺼이 겪으라고 하는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은 예수를 따르는 모든 모습대로 살았고 에디트 자신의 깊은 경험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을 자신의 저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에디트의 삶은 대체로 성부를 향한 하나의 확실한 봉헌이었다.
"하느님 아버지(압바)"와 에디트와의 관계 안에서, 굴욕과 고통과 십자가의 포기에
의해 에워 쌓이기까지 하면서도 예수를 따랐으며, 에디트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경험했고
이것이 처형 당하던 밤의 그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에디트를 지탱해 준 것이다:
"저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 격려는 저를 침착하고 마음 든든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튼튼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주는 확고한 신뢰가 아니고
힘센 팔 안에서 쉬고 있는 한 아이가 느끼는 부드럽고 행복한 안정감,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안정감입니다.
정말로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놓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항상 불안해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 아버지 사랑이 확실하다는 것도 또한 에디트로 하여금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예수를 본받도록 이끄셨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것,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을 뜻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의 모든 희망과 걱정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자기자신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자녀의 자유와 원기는 이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중 에디트는 형제애의 요구에 못지않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 분이 사랑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말고는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척도입니다".
에디트가 귀의한 다음, 처음에 에디트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모든 다른 활동을 제쳐 두었다.
영성 지도자의 도움을 받은 에디트는 곧 이 생각을 바꾸었고 예수를 따를 때는
그 분의 왕국이 도래할 때 그 분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28년에 쓴 편지에서 에디트는 성서가 요구하는 것 중 하나로 사도직 임무를
에디트가 받아들이도록 한 이 변화의 과정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수도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은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님 생각에 완전히 몰두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저는 제가 귀의하기 직전과 귀의한 후 한 동안까지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저는 이 세상에는 그 이외의 다른 것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묵상적 생활에 있어서 조차도 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저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더 깊이 빠져 들면 빠져 들수록 더욱 더
'자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수덕적인 삶을
속세로 나르기 위해 속세로 나가야 한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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